그룹명/나의 이야기

가출을 꿈꾸며

여해와담헌정 2016. 5. 16. 12:55

가출을 꿈꾸며

  김 정연

                                                                                        H 선배가 드디어 마음으로만 꿈꾸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 제주도 성산포 부근의 한적한 시골로 가서 세상일을 잠시 접고 자신만의 시간을 갖겠다는 것이다. 한 반년쯤 신문 전화 티브이 등 일체의 문화 매체와의 접속을 차단한 채 스스로의 고립과 유폐와 단절 속에서 오르지 자신만을 들여다보는 일에 몰입하겠다고 선언하며 떠나는 선배의 얼굴에는 비장한 결기마저 엿보였다. 우리는 거룩한 가출을 감행하는 그에게 기꺼이 박수를 쳐주었다.

 "자발적 유배생활이군요." 부러움 반, 시샘 반으로 농을 건네니 "맞아, 그 유혹에 빠진 지가 3, 4년 되었어. 이제야 실행해 옮겨보려는 거지." 하였다.

 H 선배는 경대 사대 부속 중, 고등학교 3년 선배인데 한동안 소식 없이 지내다가 최근 동창회 등산모임에 참석하면서 가까워진 분이다. 28년 동안 근속하던 금융계에서 은퇴한 뒤, 젊었을 적 꿈이었던 작가가 되고 싶어 사이버 대학에 입학하여 문학 수업에 열중하는 모습은 미상불 보기에 좋았다.

"가족이 이해하고 허락하시던가요?" "물론 처음에는 마누라와 자식들이 청소년기의 가출 욕망쯤으로 치부하여 한심해하더군. 내가 잘 설득했지, 건강에도 도움이 될 거고, 어차피 백수이니 집에 있다고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사람 일은 모르잖은가? 숨은 신의 선물을 받고 대작 하나 건져올 수도 있는 일 아니겠냐고 너스레를 떨어댔더니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는 눈치더군."

나는 그의 포부가 허풍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추사 김정희, 정약전과 약용 형제 그리고 윤선도나 정철 등의 선인들 모두가 유배 생활에서의 고적을 창작의 동력으로 삼았지 않았는가.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 강진에서 초의선사를 만나 ()에 심취하며 사상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깊은 교류를 하였고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매씨서평>> 등의 저서를 남겨 후세에 두고두고 지식의 귀한 본보기가 되고 있다. 또 제주도로 귀양 간 추사 김정희는 세속의 각박한 인심을 따르지 않고 어려움 속에서도 그를 따르던 제자 이상적에게 소나무와 잣나무를 통해 지조는 눈이 내린 후에야 그 절개를 알 수 있다()()를 지닌 <세한도>를 남겼으며 정약전은 귀양 기간 동안 흑산도에서 연해의 수산생물을 조사 및 채집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학서인 <<자산어보>>를 저술하여 어류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지 않은가.

나는 선배가 자발적 귀양을 사는 동안 선인들의 성취가 부럽지 않은 나름의 큰 보람이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기대하였다. 제도적 일상의 굴레를 벗어나 참다운 자유를 찾아 떠나는 그의 용기가 너무나 부러웠다. 선배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한심한 나의 처지와 신세에 절로 한숨이 나고 가슴 한 구석에 스산한 바람이 일며 불현 십 여년 전 행한 나의 가출 행각이 떠올랐다.

 

아침에 약국에 나오니 행운목 꽃가지가 싹둑 잘려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었다. 수년 동안 꽃을 피우지 않던 나무가 그해엔 꽃망울을 맺어(작은 꽃가지에 올망졸망 매달린 모양이 꼭 아카시아 꽃 모양을 닮았다.) 나의 마음을 무척 달뜨게 했다. 더욱이 큰아들이 고시를 보는 해라,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꽃에 남몰래 애정을 쏟으며 이제나 저제나 꽃 피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깜짝 놀라 누구 짓인가? 추적해 보니 범인은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 분노와 함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다짜고짜 남편에게 달려가 따졌다. "왜 피지도 않은 꽃가지를 잘랐나? 내가 얼마나 꽃 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줄 알고나 있었나? "그러자, 그 남자 왈 "다 핀 꽃 아닌가? 그리고 잘라도 될 것 같아 잘랐는데 뭐가 잘못됐나?" 되레 잘했다고 큰소리를 쳐댔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잘못이 없다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했어도 내가 보따리를 싸 집을 나서는 일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바깥을 선호하는 체질이었다. “야가 어쩔라고 그러나, 거리 귀신이 부르나, 어찌 만날 나갈 생각만 하고 사나?” 한시도 집에 붙어 있지 못하고 바깥으로만 싸돌아다니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긴 엄마의 걱정과 지청구를 자주 들을 정도였으니.

그렇지만 평생을 그렇게 살 수는 없는 일. 결혼하여 반복 순환되는 나날의 일상에 매여 사는 동안 나는, 나 혼자만의 호젓한 시간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외국여행은커녕 국내 여행도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회원으로 소속되어 있는 약사회에서 가는 해외 연수에 참석하지 못했을 때는 아쉬움이 너무 커서 며칠 동안 전전반측하며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쉬움과 서운함이 차곡차곡 쌓여 화학작용을 일으켰는지 욕구불만의 불씨로 변해가던 차에 남편이 그만 그 사건을 저질러버린 것이다. 바람을 만난 듯 불씨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울고 싶던 차에 뺨을 맞았으니 엉엉 울어줄 수밖에.

강원도 평창으로 차를 몰았다. ‘그래, 나 없이 어디 잘 살아봐라. 30년 동안 애들 낳아 키우랴, 밥 해주고 빨래하랴, 약국 보랴,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온 세월이 억울하고 분하다. 고집은 고래 심줄을 닮았고 만날 천날 된장찌개나 좋아하는 촌뜨기, 얼뜨기.’ 나는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남편의 단점과 허물을 있는 대로 떠올렸다. 난생처음 저질러보는 가출 에 신이 나서 액셀레터를 막 밟아댔다.

금당 계곡을 끼고 꼬불꼬불 이어진 산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니 '산새 소리'라는 옥호를 단 펜션이 눈에 띄었다. 혼자 차를 몰고 나타난 여자가 이상하고 걱정이 되는 듯, 이것저것 묻는 주인에게 적당히 꾸며대고 방을 구해 들었다. 갓 물들기 시작한 단풍의 색감과 바위를 비껴 돌며 콸콸 흐르는 물소리, 산새들의 지저귐까지 어우러진 자연의 교향악이 나를 축복해 주는 것만 같았다. 산대나무로 서 있으니 바람이 와서 나를 흔들어 주었다. 자연의 숨결이 내 안에 가득 들어와 마음을 맑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날 절대 자유인이 되어 자연을 만끽하는 호사를 마음껏 누렸다.

밤을 지내고 아침에 휴대폰 폴더를 열어보니 여러 통의 전화가 와 있었다. 약국, , 아들, 심지어 시집간 딸애까지. '많이들 답답한 모양이지? , 애 좀 먹어봐라.' 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펜션을 나와 인근 봉평에 있는 이효석 문학관으로 차를 몰았다. 문학관 앞뜰에는 청동으로 조각된 이효석의 좌상이 있었다. 둥근 테의 안경을 끼고 테이블에 앉아 글을 쓰는 모습. 그의 손에 내 손을 얹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살아있는 듯 체온이 전해졌다. 그의 육필원고와 사진, 유품들을 보았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인 장터의 주막과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가 인연을 맺었던 방앗간 등을 둘러보며 작품 속에 흠뻑 빠져든, 오롯한 시간은 무척 행복했다. 불쑥 남편과의 달콤했던 신혼 시절이 떠올랐다. 말없고 무뚝뚝한 성격이 오히려 과묵한 것 같아 장점으로 보였던 남자, 그리고 나밖에 모르는 자상한 남자였는데.... 까닭 없이 허기가 몰려왔다. 봉평 장터에 가서 된장찌개보다 훨씬 맛있는 봉평 메밀막국수를 이 인분이나 먹었다.

다음날의 밤, 산간에 어둠이 내리고, 자유로운 해방감에 한껏 고무되어 서너 잔 마신 메밀 막걸리 탓인가!  나의 마음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작은 동요가 일어났다. 숲을 흔들며 부는 바람과 검게 일렁이는 나무들의 자태가 내 마음에 적막감을 안겨다 주었다. 조금씩 외롭고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틀 동안 팽개친 약국 일도 걱정이 되었고, 더욱이 큰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같아 눈물이 났다. '내가 좀 심했나?' 남편이 모르고 한 일을 가지고 너무 몰아붙인 옹졸함도 뉘우쳐지고 별일 아닌 것에 괜한 까탈을 부린 것 같은 생각에 얼굴이 붉혀졌다. 30여년 만에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은 어쩜 그리도 멋대가리가 없는 사람이냐? 여자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언제 한번이라도 따뜻한 말로 나를 위로해 준 적이 있느냐? 내가 집으로 돌아가면 많이 달라진 당신의 태도를 보고 싶다.’ 등등의 힐난인지 하소연인지 모를 말들을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방문 고리가 허술한 것에 신경이 쓰여 고스란히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날 밝기가 무섭게 서울로 향했다. 액셀레터를 밟는 발에 나도 모르게 힘이 가해졌다.

 

그해 가을 나의 일회성 가출은 별반 소득 없이 끝이 났다. 나는 계속 된장찌개를 끓였고, 애들 뒷바라지에, 약국 일에 매달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삶을 살았다. 그러느라 여전히 해외여행은 엄두도 못 내고 있으며 더더구나 멋진 작품을 쓰고 싶다는 어설픈 꿈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우리 윗세대들은 너나없이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유보하며 살아왔다. 현재에 충실할 때 아름다운 미래가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미래를 위해 나의 현재를 희생시킬 수 없다. 내 나이가 얼마인가? 육십을 훌쩍 넘어 좀 있으면 지공파(지하철 공짜로 타는 사람)에 이른 나이가 된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다.

 H선배는 내 잠자는 꿈의 세포를 일깨워 주었다. 가까운 미래에 나도 선배의 뒤를 따르리라 야무진 각오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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