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자락의 연가(戀歌)
김 정연
“시원한 해창 막걸리 한잔 마시고 가세요.”
소리의 진원지를 쳐다보니 육십 중반쯤 되었을까, 곱상하게 늙은 아주머니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산 정상에서 목마름을 축이는 정상주도 한잔 못 마셔, 무언가 미진한 기분을 느끼던 참이라, 더욱이 해창 막걸리라는 말에 이끌려 간이천막 속의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며칠 전 어떤 일간신문에서 해창 막걸리에 관한 칼럼을 읽고한번 마셔 보고 싶던 참이었다.
대여섯 평 쯤 되려나? 테이블 두개에 의자가 여남은 되는 주점 한켠에 아이스박스가 있고
휴대용 가스버너 위에서는 부침개가 두서너 쪽 데워지고 있었다.
“혼자 산에 왔는가 보네요.”
양은그릇에 막걸리를 따르며 아주머니가 물었다.
'네, 그런데 이게 해창 막걸리예요?"
“그럼요, 이래 뵈도 저, 전라도 남쪽 땅끝 마을에서 공수해온 거랍니다. 호호호"
'공수'라는 말이 재밌어서 나도 따라 웃으며 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막걸리는 누룩의 독특한 향과 어울려 꽃 향이 알싸하게 느껴지는 특이한 맛이었다. 시중에서 대량 생산하는 여느 막걸리와는 확연히 맛이 달랐다. 갈증이 해소되고, 마음의 갈등까지 시원히 풀리는 것 같았다.
마음이 심란하거나 생각이 복잡하면 나는 혼자 산엘 오른다. 오늘도 아침에 남편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도망치듯 도봉산으로 향하였다. 산을 오르며, 사소한 일에 신경을 곤두세운 내 자신에게 스스로 원망이 들었고 산을 내려오면서는 나의 그런 예민한 부분을 감싸주지 못하는 남편의 옹졸함에도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 마음의 응어리가 해창 막걸리 한 잔에 사르르 풀리고 있었다.
“여기서 오래 하셨어요?”
“아니요, 한 서너 달 되었나? 이 옆에 자리 펴고 앉아 계시는 분이 우리 서방님이예요. 호호호"
그러고 보니, 도봉산에 올 때마다 매표소 좀 못 미친 곳, 돌 담벼락에 ‘철학, 사주, 작명’ 등의 글자가 쓰인 헝겊 간판을 걸어 놓고 그 앞에 정좌하고 있던 초로의 노인을 본 듯도 하였다. 특이한 것은 간판에 '철학'이라는 글자가 유독 크게 씌어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서방님이라는 호칭도 재미가 있고, 아주머니의 밝은 웃음에 행복이 묻어 있어 궁금한 마음이 발동하여 유심히 그 남자 분을 살펴보았다. 키가 훤출하고 젊었을 적엔 준수한 모습이었을 그 분은 한가로이 공자, 맹자 왈인 듯한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 분이 저래 뵈도 학식이 대단해요. 글도 잘 쓰시고.”
묻지도 않는데 아주머니는 그저 신명이 나서 서방님을 자랑하였다.
“아, 그래요. 언제 만나셨는지?”
척 보기에도 백년해로를 약속한 부부 같지는 않아서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하였다.
나는 수필가라서 그런지 세상일에 관심과 호기심이 많은 편이다. 또한 글을 잘 쓰려면 인생의 갖가지 경험도 필요하다는 지도 교수의 말도 불현듯 떠올라, 특이한 전(展)을 펼치고 있는 두 사람의 애정 행각에 슬그머니 궁금증이 일었다.
“우리는 같은 동향이며 학교 선후배 사이예요. 서로 존재를 알고 지낸 지는 십여 년 되었는데, 내가 특히 저 분을 추종했지요. 저 분이 이 년 전 홀로 되셨고, 나는 애들 아빠와 이별한 지가 삼 년쯤 되어요. 운명 같은 걸 느껴요.”
하, 그렇구나, 인간의 엮임은 운명적이고 사랑도 숙명적이라야 완벽할 수가 있나 보다.
“두 분 행복하세요? 아주머니는 행복해 보입니다만,”
“네, 저 분 말씀이, 제가 딱 이상형이라고 했어요. 호호호”
하도 호호호 거리니까, 아주머니의 서방님은 공자에서 눈을 떼어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눈길을 호호호 아주머니에게로 돌렸다. 내가 옆 눈으로 살펴보니 아주 그윽한, 사랑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두 잔째 마시는 해창 막걸리는 두 분의 사랑이 녹아들었는지 더욱 시원하고 달콤했다.
나도 오늘 저녁엔 남편 앞에서 호호호 하고 한번 웃어 볼까?
'이 여자가 더위 먹었나? 안 하던 짓을 하고!' 은근히 좋으면서도 멋쩍어서 퉁명스럽게 핀잔을 주는 남편의 얼굴이 떠오른다. 석 잔째의 해창 막걸리는 우리 부부의 관계처럼 씁쓸한지, 노년 사랑에 취한 두 분의 관계만큼 달콤한지 맛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꿈결같은 색소폰 소리가 들려온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불어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도봉산 자락에서 색소폰을 부는 아저씨가 한 분 계신다. 레퍼토리도 다양하고 능숙한 연주여서 산행 때마다 잠시 걸음을 멈추어 듣곤 하였다. 지금 들리는 곡은 ' Can't help falling in love' 이다. 달콤한 수마(垂魔)에 눈꺼풀이 사르르 감긴다.
“서방님, 더운데 막걸리 한잔 하셔요.”
“그럴까, 임자도 같이 한잔 하시게!”
분명 꿈속이렸다. 내가 어느새 호호호 아주머니가 되어, 그윽한 눈빛의 철학자와 노닥거리고 있잖은가, 내 나이 더 들면 운명적인 사람과 함께 이렇게 전(展)을 펴놓고 세월을 보내고 싶어하는 염원을 산신령님이 들어주셨나 보다.
설핏 잠에서 깨어보니 네 번째 막걸리 잔 속에 여름날의 저녁해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