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반란
김 정 연
“약사님, 시간 있으면 제 얘기 좀 들어 주세요”
오늘 따라 뽀얗게 분을 바르고 입술에 짙은 핑크빛 루주를 칠한 단골 고객 할머니가 심각한 얼굴로 청을 한다. 만성 노인병 처방약을 비롯하여 건강에 좋다는 대체 의약품 등의 상담과 구입으로 자주 오시는 분이다. 마침 약국에 다른 손님도 없어서 곁의 의자로 모시니 살짝, 내 귀에다가 속삭이신다.
“제가요, 요즈음 남자가 그리워요. 잠을 자고 싶어요.”
무언가 이날따라 좀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할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평소의 수위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음성 속에 이른 봄의 열기까지 실려 있는 듯하다. 평소에도 에둘러 말하기보다는 직설적인 표현을 잘 하시는 분이었지만 이런 내용을 꺼리낌없이 토로하다니!
나는 놀라 뛰는 가슴을 진정키 어려웠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만 간직하던 비밀스런 사연을 들킨 듯, 혹은 일흔 남짓의 인생 선배에게 무언가 패배를 당한 심정이랄까, 도무지 분간키 힘든 감정이 밀려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하, 요즈음 더욱 많이 예뻐지셨고 멋도 부쩍 부리시더라니, 연애하시나 봐요.”
나는 능청을 가장하여 그녀가 연애라는 거사를 도모하는지 어떤지를 물어보았다.
“연애는 무슨! 혹시 내가 몹쓸 병에 걸린 건 아닌가 하고요?”
“아이구, 그게 병이라니요! 할머니가 그런 마음을 갖게 된 건 심신이 매우 건강하시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나 쉽게 갖는 욕망이 아니니 축복이라 여기시고 멋진 할아버지 찾으셔서 연애를 즐겨보세요. 하하하”.
내가 명쾌하게 결론을 짓고 처방을 내 드리자 할머니는 수줍어하면서도 흡족한 듯 얼굴에 가득 홍조를 띄우며 환하게 웃으셨다.
성의학 관련의 고명한 학자 A. C 킨지는 여자의 성욕은 남자와 달라서 일생토록 큰 변화 없이 지속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일흔 초반 홀로된 할머니의 욕망 지수가 결코 해괴망측한 수준은 아니리라.
몇 달 전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친구는 육십 대이고 할머니는 팔십대였으며, 두 사람 모두 한국으로 빨리 돌아와야 한다는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한다. 친구는 자식 집안일과 손주들 건사를 해주다보면 파출부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니 일찍 돌아와야겠다는 푸념이었는데 곱상한 할머니의 사연은 좀 특이하고 놀라운 것이었다. 영감님과 사별한 지 오년이 되어가는 할머니는 경로당에서 서로 마음이 맞는 한 할아버지와 친하게 되었다. 두 살 연하의 멋쟁이 할아버지는 다른 할머니들에게도 인기가 꽤 높아서 경로당 할머니들 간에 은근한 시샘과 더불어 경쟁의 암투가 일어났다. 그래서 할머니는 항상 긴장과 염려 속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이런 이유로 오랫동안 미국에 체류할 수 없다고 하였다.
“사람이 얼마나 떨어져 살면 마음이 변할까요?” 간곡한 마음으로 질문을 하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정말 비행기 안에서라도 할 수만 있다면 발걸음을 되돌리고 싶은 표정이 역력하였다.
“아이고, 그렇게 못 믿을 분이면 뭐 하러 사귀세요?” 내 친구는 정말로 딱한 심정이 되어서 물었지만 노년의 절박한 심정이 그대로 자기 마음에도 와 닿더라고 하였다. 문득 장난기가 도진 친구가 “그럼 요즈음도 스킨십을 하셔요?” 라고 짓궂게 물었더니 한치의 망설임 없이 답이 돌아왔다.
“그럼요, 어젯밤에도 공항 근처 모텔에서 함께 잠을 자고 아침에 그 분이 나를 배웅해 주었어요.”
이 이야기는 여학교 동기들 점심 모임에서 나온 화제였는데 막 육십 대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은 부정과 긍정, 놀람과 흥분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할머니 할아버지 로맨스에 갈채를 보내는 측과 ‘아이구 망측해라, 이 나이에...’ 하며 내숭을 떠는 부류 그리고 말을 아끼는 신중파들로 나뉘어졌다. 건강상의 개인 차이도 여러 갈래로 갈라질 나이이고 부부 간의 금슬이나 삶의 철학도 제각각일 수 있는 실버 세대, 아니 요즈음엔 신중년 또는 사추기라고도 표현하는 애매한 세대인 우리 동기들의 겉표정 이면에는 경탄과 부러운 마음들이 꽤 있었던 듯하다.
의료 환경의 경이적 발전과 섭생과 건강생활의 수준이 고도로 높아감에 따라 인간의 오욕칠정도 비례한다는 생물사회학적 통계가 있다. GNP가 500을 넘어서면 식욕보다도 성욕의 욕구가 강해진다는 조사 결과도 나온 적이 있다. 그리고 평균수명의 장수화도 인류사에 새로운 존재 양식을 배태하기 시작하여 미래 시대에는 평생 동안 두 세 번의 결혼 생활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예측과 폴리아모리즘이라든가 다자간의 사랑 방정식도 벌써 여기저기 활자화 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약국을 자주 찾는 그 할머니의 독백과 친구가 들려준 팔순 할머니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나는 건강한 몸의 욕구에 대한 솔직한 고백으로 받아들인다. 삶의 양식에 절대적 가치는 없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태도야말로 아름다운 삶의 양식이라고 생각한다. 몸의 배고픔에 대한 인간의 본능을 굳이 나이 값에 연계하여 터부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건강한 몸의 신호로 받아 들여도 무방하지 않을가? 나이와 상관없이 몸의 욕망을 느끼고 실천하려는 그분들의 태도와 의지가 놀랍다. 그녀들에게 힘껏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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