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이야기

약국 문지방을 넘어서

여해와담헌정 2015. 12. 28. 17:18

 약국의 문지방을 넘어서

 

                                                              김 정연


 “김 약사 내일 시간 좀 낼 수 있을까?”

 여름 장마와 무더위가 사람을 지치게 하는 후텁지근한 오후, 이런 날은 환자들조차 몸이 불편하여도 병원과 약국을 찾을 엄두를 못 내는지 약국 앞은 인적조차 뜸하고 내 머리도 거리를 따라 텅빈듯한데 정 선배가 전화를 했다. 대학교 선배이자 같은 지역에서 약국을 개업하고 있어서 약사회 모임 같은 때면 가끔 만나 뵙는 분이다. 후원하고 있는 보육원에 약을 좀 가져다주려고 하니 같이 가자는 그의 제의에 갑자기 할 일을 찾은 듯 흔쾌히 수락하며 잠시 선배의 모습을 떠올린다.

 

 자그마한 체구의 선배는 얼굴이 예쁜데다 말씨마저 상냥해 평소 동문 간에 인기가 높다. 외유내강인가, 부드러운 외모와는 달리 성품은 매사에 열정적이어서 일찍부터 약사회 일에도 적극 참여, 지난 30여 년 동안 대한 약사회를 이끈 숨은 공로자이기도 하다.

맏딸 아래로 두 아들을 모두 훌륭히 키워내며 그는 약국 경영 틈틈이 영어도 수준 높게 통달하고 이름 있는 인문학 강좌의 수강에도 열성을 쏟는 등 자기계발에도 열심이었다. 더불어 노래나 춤에도 끼가 넘치는 다재다능한 재인이다.

 아무런 부족함을 모르고 행복하기만 하던 그에게도 시련이 닥쳐왔다. 16년 전 건실한 사회인으로, 또 자상한 가장으로 큰 버팀목이던 남편이 갑자기 유명을 달리 하였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인지 집에 불까지 나면서 선배의 삶은 잠시 휘청거렸으나 다시 마음을 다잡고, 경제적인 어려움과 마음의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그는 더욱 열심히 약국 일에 매달렸다. 하루 종일 서서 약을 짓고 판매하다 보면 발이 붓고 몸은 파김치가 되어서 삶이 무언지 그 의미조차 잃을 지경이던 2000년대 초, 우연히 적십자 병원에서 주관한 ‘외국인 근로자’ 진료에 참여했던 선배는, 병들어 쇠약해진 그들이 약을 받고 고마워하는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정신적인 희열이 크게 오더라고 했다. ‘남을 위한 봉사를 내 힘이 미치는 한 해야겠다.’는 결심을 단단히 하게 된 계기가 바로 그때였다고 한다.

 선배는 다문화 가정 진료를 위시해 수해 지구와 독거노인 가정 등 우리 약사들의 역할과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서 그들을 따뜻이 보살피고 치료에 정성을 쏟았다.

 

 그 뿐인가, 일반적으로 힘들어하는 심야 약국 당번도 자진해서 행한다. 물론 집과 약국이 한 건물에 있다는 편리함이 있겠지만 한 밤중이나 새벽 두세 시에 찾아오는 환자들을 맞이하기가 얼마나 귀찮고 고달플까만 조금도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는 그녀는 철인같이 보인다. 집과 가게가 함께 붙어있던 약국 초년병 시절, 나도 수없이 겪은 일이라 그 힘든 사정은 정말 설명이 필요 없다. 자정이 가까울 즈음 약국 문을 닫고, 이런 저런 집안일을 대충 마무리 하곤 고단한 몸이 잠 속으로 살짝 빠져 드는 순간, 갑자기 셔터 문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가 온 동네를 깨운다.

“약 좀 주세요, 우리 애가 열이 펄펄 나요.”

외치는 소리에 비몽사몽간 일어나 약을 주고 들어 와 다시 눈을 붙이려하면 이번엔 남자 목소리다.

“아줌마, 술 마시고 배가 아픈데 약 주시오.”

정말 짜증과 부아가 부글부글 일어나지만 다시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마지못해 약을 내어 주던 괴로움의 기억은 정말 어디다 내다버리고 싶다, 그뿐인가, 의약 분업과 상비약 슈퍼 판매등 사회적 제도의 변화 속에서 약사의 직능에 회의를 느끼며 갈등 속에서 살고 있는, 나같이 생각만 많은 인간은 결코 못해 낼 어려운 일들을 그는 부지런히 실천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아픈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데에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고 하는 선배를 나 비록 흉내 내기 조차 어려우나 평소 존경하며 닮고 싶어 했던 터라 보육원 동행은 더없이 느낌 좋은 나들이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모든 게 텅 빈 듯한 이런 날 오후에 그 실천적 대열에 함께하다니!

 

 ‘성모 자애 보육원’은 상계동에 있는 천주교 재단의 고아원으로, 부모를 잃었거나 부모가 돌보지 못하는 아이들 100여명(갓난쟁이부터 고등학교 다니는 언니 오빠들까지)이 수녀님들과 자원 봉사자들 품에서 큰 탈 없이 자라고 있다. 자주 들러 낯이 익은 듯, 다섯 살짜리 여자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선배 품에 안긴다. 백일도 채 지나지 않은 갓 난 아기일 때 보육원에 들어와서 밝고 명랑하게 잘 자라 지금은 이곳의 귀염둥이가 되었다는 ‘미연’이다.

 선배가 풀어 놓은 약 보따리에는 상비약뿐만 아니라 모기 살충제 까지 다양하다. 나도 조금 준비해 간 어린이 영양제를 나눠 주니 꼬마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그러는 중에도 저쪽 방 한구석에서는 어떤 청년이 10여 개월 된 아기를 어설프게 어르고 있다. 그들 곁에서는 수녀님 두 분이 눈물을 글썽이고 계신다. 궁금하여 여쭤 보니 기막힌 사연을 들려 주신다.

 

 그 청년은 아기의 아빠인데 역시 이 보육원 출신이란다. 두 살 때 이곳에 맡겨져 고등학교 까지 마쳤으나 부모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학교를 마친 후 그는 어떤 유통 업체에 취직을 하여 성실히 근무를 하던 중, 같은 직장에서 알게 된 아가씨와 사귀다가 혼전 아기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천애 고아인 청년을 여자 쪽 부모가 좋아하였을 리가 없어 큰 장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우여곡절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끝내 아기를 낳아 기르기를 몇 달, 산후 몸조리의 불충분과 생활고 까지 겪게 된 아기 엄마의 건강이 극히 나빠지자, 친정 부모들이 여자를 데려가 버렸다. 청년은 징집이 면제될 수도 있었지만 자원입대를 하면서  자립할 때 까지 아기를 맡아 달라고 자신이 성장한 이곳으로 데려 온 형편이라는 것이다. 아기는 무엇을 느꼈는지 아빠의 무릎에 자꾸 얼굴을 들이밀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그런 아기를 안쓰럽게 어루만지는 젊은 아빠의 모습을 보며 ‘핏줄의 인연이 이리도 절절하구나’ 하는 감동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그 부자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는데, “보육원 대물림 이네” 하는 선배의 탄식이 마음속을 크게 울린다. 대물림으로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이 어디 고아들뿐이랴, 아픈 허리를 두드리며 파지를 주워 손주 둘을 키우는 정후 할머니, 엄마가 가출해서 어린 동생을 돌보며 소녀 가장 노릇을 하는 혜진이, 어렵게 탈북해서도 정착을 못하고 질병과 빈곤에 고통을 받는 최재운씨 가족 등, 우리 약국 단골 환자인 그들의 모습이 주마등 같이 눈앞을 스친다.

“다른 애들도 다들 딱해. 걔들을 보면서 난 내 슬픔에만 빠져있을 수가 없었어. 약국이 힘들다고 투정부리는 건 사치란 생각이 들데. 스트레스 푼다고 주말에 사람 만나서 먹고 수다 떠는 것도 마음에 걸려.”

이어지는 선배의 말이 게으른 내 가슴에 박히며 불현듯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내 가족의 안녕과 나 자신의 행복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삶이, 하루 종일 좁은 약국 안에 갇혀 사는 약사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 것이냐고 전전긍긍한 오만이, 그리고 자신의 안락에만 머물며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베풀지 못한 이기심이 민낯을 드러내었다. 앞으로 더욱 자주 선배와 동행하여 베품과 봉사의 한 모퉁이에서나마 동참하는 보람을 느껴야겠다는 결심 속에 마음을 약국 문지방의 밖으로 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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