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이야기

낙엽 다비식

여해와담헌정 2013. 11. 9. 12:37

 비 그친 시골길엔 가을색이 화려하다.

당단풍과 복자기 단풍의 빨간색은 농염한 루즈색에 버금가며,

은행잎의 노란빛은 앙증스럽고 애틋함을 자아낸다.

먼지 씻긴 하늘엔, 노을에 물든 구름이 유유하며,

떡갈과 굴참나무의 이파리들도 황금 노을빛이다.

우리들 생의 나이와 같은  만추의 정령들이 마음을 몹씨 설레게 한다.

 

 며칠전 수동 비금리에 사는 친구 A로 부터 은근한 유혹의 초대를 받았다.

'낙엽 다비식을 하러 오지 않겠니?' 라는.

하, 다비식이라,

도를 깨치고 수양의 경지에 도달한 스님이 열반하신 것도 아닌데...

잠깐 친구의 엉뚱한 제의에 멈칫한 마음이었으나 이내 머리가 끄떡여졌다.

봄 여름 치열한 삶의 고단함을 접고 고요한 쉼의 세계로 들어가는 나무잎의 생애도 원래의 자리,

즉 고요한 곳으로 돌아가는 스님의 열반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껴서이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도 생명으로부터의 이탈이 아니고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의 회귀, 그래서 끝내는 우주와의 합일을 이루는 것 아니겠는가?

 

 신작로에서 수동계곡을 건너야 친구A의 펜션에 이른다.

그녀는 계곡위에 걸처진 삭막한 시멘트 다리 난간에 형형색색의 전구를 달고 

아치형 입구문까지 만들어서  운치있는 다리로 둔갑시켰다. 

우리는 그 다리의 이름을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라고 부른다.

 우리가 사십대 후반이었을때 제임스 윌러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라는 실화소설이 나왔었다.

그리고 그 소설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시골 마을에 여행온 사진 작가와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여자가 생전 처음보는 서로에게 빠져

나흘 동안 뜨겁게 사랑을 나누게 되나 결국은 헤어지게 되는 이야기다.

 같이 떠나자는 남자의 제의에 갈등하던 여자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끝내는 현실의 삶에 순응하고 생을 마친 여자의 유품에 남자가 보낸 연애 편지와 선물들,

그리고 여자의 일기를 자식들이 챙겨보며 엄마의 짧지만, 운명적인 사랑을 회상하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그 영화에 열광하여, 모두들 그런 멋진 연애을 한번 해 보았으면 하는 환상에 빠졌었다.

 속절없이 나이 들어가는 중년의 허무함을  메꾸어 줄  멋진 로맨스을 꿈꾸었다.

그러나 꿈은 꿈으로만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우리들 중 누구도 그런 행운을 가지지 못했었다.

허탈한 마음을 달래려 우리는 다리의 명명식날에 술들을 마셨다.

그리고는 최무룡의 '꿈은 사라지고' 노래를 목청껏 불렀었다.

그때의 우리들 생은 초가을 쯤이었었던듯 하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펜션 앞마당엔 이미 모닥불이 할활 타오르고 있다.

계곡의 맑은 물소리가 고즈녁한 산간을 흔들고 저 멀리 숲속에선 바람이 일렁이는 소리가 들린다.

싸리 빗자루로 쓸어서 수북히 쌍아 놓은 낙엽 두엄에서  한줌을 집어 불속으로 던진다.

채 마르지 못한 낙엽은 잠깐 몸부림을 치다가 이윽고 불속으로 잦아든다.

매캐한 듯한 조금은 비릿한 풀내음 같은 냄새가 느껴진다.

또 한번 낙엽 한줌을 집어 모닥불에 얹는다. 불꽃이 피어오른다.

너울거리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번제' 라는 말이 떠오른다.

제물을 제단에 올려 불로 태우는 제사를 뜻하는 말이다. 차라리 다비식 이라는 말 보다는 번제라는 의미가 더 적절할 것 같다.

생명을 허락해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여 자기 소멸과  희생의 제사를 올리는 낙엽이 거룩해 보인다.

오늘의 제물은 낙엽 외에, 우리들의 몸과 영혼에 잔뜩 쌍아 놓았던 부질없는 것들도 포함했으면 싶다.

물질의 탐욕과 속박은 물론이고  내면의 어리섞은 집착과 마음의 오만을 제물로 올리고 싶다.

제물의 봉헌 뒤에 죄씻음의 은헤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된다.

아니, 그 마음도  이기적인 욕심일수 있겠다.

이것 저것 홀가분하게 비우는 경지에는 오르기 어려운가?

그래서 인간이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건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무는 상념에 잠기는데,

비금리의 가을밤이 이슥해지며 하나 둘 별들이 빛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