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구처럼 하늘을 훨훨
김 정연
음력 정월 스무엿새, 어제가 친정아버지의 기일이었다.
공교롭게도 시아버님의 기일이 같은 날이어서 나는 아버지의 제사에 참석할 수가 없다. 하루 종일 제사 준비로 바쁘면서 문득문득 아버지께 죄송스러움으로 가슴이 아렸다. 저 세상에서 아버지는 아직도 철부지 딸내미를 그리워하고 계실 것 같다. 37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들어 가거라, 내 간다."
37년 전 이른 봄 날, 아버지는 문 앞에 서서 배웅하는 나를 자꾸 뒤돌아보며 서울역으로 향하셨다. 그날따라 뒤에서 본 아버지의 구부정한 어깨가 몹씨도 쓸쓸하게 느껴졌다.
결혼 2년 차였던 나는 그때 둘째 애를 가져서 입덧이 심했다. 밥도 못 먹고 비실대는 딸이 안스러우셨는지 아버지는 손수 걸레질을 하시고 맛있는 것을 사다 먹이려고 애를 쓰셨다.
평소에 술을 많이 드신다고 내가 싫어 하니까, 사위가 사다 준 맥주를 나의 눈치를 살피느라 맘 놓고 못 드시고 집을 떠나선 외지에 오래 머무르질 못하시는 분이 서울 딸네 집에 오셔선 일주일이나 계셨다. 이승에서의 마지막임을 어렴풋이 느끼셨던 것일까?
대구에 내려가신 아버지는 일주일 후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회갑도 못 지내신 57세였다.
"우리 연이 눈엔 총기가 철철 넘치는 기라, 이쁘제.“
초등학생인 나를 무릎에 앉혀 놓고 약주를 드시며 아버지는 자랑을 하신다. 친구 분들과의 모임에서다. 아들을 하나 보고, 그 밑으로 둘씩이나 여자애를 잃고 나를 얻으신 아버지는 천하에 없는 자식을 얻으신 양 애지중지 하셨다. 안 데리고 다니는 곳이 없었다.
감성이 풍부하고 예술을 좋아하셔서 연극, 악극, 서커스 등 많은 공연을 나의 손을 잡고 가셨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제목이 <<눈내리는 밤>>이란 연극은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칭을 가진 전옥과 미남 배우 최무룡이 출연했는데 많이 슬픈 내용이라 아버지도 나도 같이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꼭 나를 업고 오셨다.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시면서.
아버지의 넓적한 등에 업혀 편안한 기분으로 밤하늘을 쳐다보면 무수히 많은 별들이, 은하수가 머리 위에서 아름답게 빛났었다.
약주를 드시면 나를 무릎에 앉히고 뺨을 부빈다. "아이 싫어, 까끄라봐. 아부지는 왜 맨날 술을 묵어?"
술 드시는 아버지를 타박하면서도 나는 아버지가 따라 주시는 맥주를 냉큼 냉큼 잘 받아 마셨다. "부전 여전이라. 우리 연이가 나를 많이 닮았어. 허허." 술 잘 마시는 것도 기특해 하셨으니 요즈음 나의 술 실력은 그때부터 훈련된 결과이리라.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나의 뺨은 아버지의 까칠한 턱에 수난을 당하곤 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아버지와 나는 의견이 맞지 않아 자주 입씨름을 하였다. 아버지의 감성을 닮은 나는 문학을 공부한다고 서울의 Y대 영문과를 택하려 했고, 아버지는 이제 여자도 자신의 일을 하고 당당히 살아야 하는 시대라며 대구의 H대 약학과를 가라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애지중지하는 딸을 홀로 외지에 보내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숨은 뜻이 있었던 듯하다. 내가 뜻을 굽히지 않고 아버지와 팽팽히 대결을 하던 차에, 아버지가 하혈이 심한 치질로 입원을 하셨다. 병상에서 핼쓱한 얼굴로 다시 설득하시는 아버지에게 내가 그만 항복을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마음이 여린 게 약점이다. 상대가 측은해 지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무조건 양보를 한다. 그 약점을 제대로 활용한 아버지에게 내가 지고 만 것이다.
나의 진로는, 그리고 나의 팔자는 아버지의 치질병 땜에 결정되었는데, 그렇게 약사를 만드시고도 아버지는 나에게서 약 하나 얻어 드시지 못하셨다. 허긴 아버지가 약 드시려고 나를 약대 보내신 건 아니지만 만일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세상의 좋은 약이란 약은 죄다 구해서 드릴 수 있으련만.
나로 인하여 아버지가 우신 게 세 번쯤 된다. 처음 한번은, 네 살 된 내가 페니실린 주사약 병을 입에 물고 놀다 방 문지방에서 뒤뜰에 떨어졌다. 온 얼굴에 피범벅이 된 딸을 안고 아버지는 맨발로 병원으로 뛰었다. 유리 조각에 찢어진, 또 유리 조각이 여럿 박힌 여린 입술을 꿰어 매는데 아프다고 앙앙 우는 딸이 안쓰러워 아버지는 눈물이 났다 한다. 두 번째는 나의 결혼식 날, '신부 입장' 소리에 걸음을 떼어 놓으려다 보니 팔짱을 끼고 같이 들어갈 아버지가 안 보였다. '어디 가셨나?' 당황하는데, 화장실 쪽에서 눈이 벌개진 아버지가 오시는 거였다. 혼자서 울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결혼 후 서울로 떠나오는 나를 배웅하며 차가 떠날 때까지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아버지는 눈물을 글썽이셨다.
요즈음은 자주 부모님이 생각난다. 엄마는 아직 생존해 계시나 60이 넘은 이 나이에도 그저 나는 받기만 한다. 사랑을, 걱정을, 그리고 약값이라며 돈도 받는다. 대구가 그리 먼 곳이 아닌데도 자주 가 뵙지를 못한다. '별일 없제?' 하는 전화도 엄마가 자주 하신다.
며칠 전 엄마의 생신 때는 엄마 곁에 누워 너무 일찍 내 곁을 떠나신 아버지가 야속하면서 또 그리운 마음에 가슴이 멍멍해지는 밤을 보내었다. 지금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잘 부르시던 노래, '백구야 훨훨 날지를 말아라. 너 잡으러 내 안 간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가 요만 허면 넉넉하지.'의 백구처럼 하늘을 훨훨 날고 계실까?
2011,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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