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이야기

한 장의 사진

여해와담헌정 2012. 11. 8. 15:55

 

한 장의 사진


                                                          김 정연


 빛바랜  사진 속 엄마는 젊고 예쁘다. 우물 앞, 양철 두레박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를 중심으로 조롱 바가지를 입 가까이 대고 물 마시는 시늉을 하고 있는 아홉 살 단발머리 나와 중학생 까까중머리 오빠, 그리고 집안의 허드레군으로 와있던 사촌언니가 좌우 대칭으로 나란히 서 있다.

 "단기 4288년,5월15일. 우리 집 우물 앞에서 어머님을 모시고 눈니와 누나를 다리고서 아버지께서 가져든 카-메라로 손수 찰영하신 영원에 기억이 될 가족사진이다. 이날에 일기는 화창한 봄기운이 넘치는데도 또한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창공은 푸릇다. 동쪽에서 남쪽을 돌아 서쪽으로 가는 종달새가 왔는 봄을 너저질까 념념하고 울고 간다. 뜰아래 난초꽃턴 나는 이미 늘떠라도 필동말동 웃는 목단꽃턴 힘차게 피어 달라꼬 기원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난초꽃, 눈니와 나와 누나는 목단꽃치랏고 보겠다."

 사진 뒷면에 아버지가 오빠의 마음을 빌려 깨알 같은 글씨로 남긴 메모를 읽자니 가슴이 괜시리 뭉클해지고 울컥해진다. 사진을 들여다보며 나는 한 장 한 장 추억의 페이지를 넘긴다.

  대구시 대봉동 19번지. 내 유년의 집 우물은 깊고 맑아서 동네에서 단연 인기가 좋았다. 우물가엔 채송화, 분꽃, 맨드라미, 난초, 목단꽃이 계절 따라 피고지곤 하였다.

 여름날, 퇴근해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등목을 하실 때 꼭 나를 부르셨다. "아부지는 맨날 나만 부르고 해, 귀찮아 죽겠네." 아버지의 귀에 닿지 않게 쫑알거리면서도 나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버지의 허리춤이 적셔질까 조심조심 등에 물을 끼얹고 넓적한 등을 탁탁 치면서 겨드랑을 간질이는 장난을 쳤다. "아부지, 안 간지럽나?" 발바닥만 만져도 간지럼을 심하게 타는 내가 물어보면 "어언지, 우리 연이 손은 하나도 안 간지럽다." 난 그런 아버지가  신기했다.

 맑고 찬 대기를 뚫고 따뜻한 햇살이 뜨락에 내리는 겨울날이면, 엄마는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와 뜨락에서 세수를 하셨다. 대청마루 끝에 걸터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며 나는 세수하는 엄마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런 나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는 럭스 비누로 거품을 하얗게 내어 이마며 귀 뒤쪽과 목덜미를 구석구석 문질렀다. 세수에 열중하던 엄마는 가끔 생각난 듯 하얀 거품 속에서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기도 하고 바람이 흔드는 대문 쪽을 힐끔거리기도 하였다. 눈을 꼭 감고 세수를 하곤 했던 내가 "엄마, 눈 안 따갑나?" 하고 물으면 "괘안타, 안 따갑다." 하고 말하는 엄마도 아빠 못지않게 내게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비 오는 여름날 저녁, 앞집 담장을 넘어오는 구수한 내음이 코에 닿았다. 정순이 집에서 끓이는 콩나물 갱죽 냄새다 (멸치를 우려낸 국물에 콩나물을 넣고 끓이는 갱죽은, 적은 재료로도 여러 식구가 먹을 수 있는 경제적인 음식이다).

 육이오 전쟁을 겪은 직후라 모두들 살림이 어려웠다. 가느다란 기계 국시 (요즈음의 잔치국수) 아니면 갱죽은 좋은 저녁 꺼리었다.

 식구가 많은 정순이네는 자주 갱죽을 끓였고, 살림이 넉넉한 우리 집은 밥을 먹었다. 그런데 나는 콩나물 갱죽이 밥보다 좋았다. 멸치 국물의 달큰한 맛과 콩나물 대가리의 고소한 맛이 내 입맛에 맞았다. 정순이와 나는 담장 너머로 죽그릇과 밥그릇을 바꾸어 먹었다. 그런데 문제는 담장이었다. 담장 높이가 내 키를 넘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매번 오빠에게 그 일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가시나가 아무거나 묵지, 왜 맨날 카탈부리노” 오빠는 툴툴거리면서도 동생의 유별난 취향을 한 번도 거부하지 않았다. 오빠의 나에 대한 사랑은 특별하였다. 자주 나를 자전거에 태우고 신작로를 신 나게 달렸다. 핸들도 잡지 않고 씽씽 달리는 오빠의 등 뒤에 찰싹 붙어 무섭다고 앙앙거리면서도 나는 그런 오빠가 자랑스러웠고 그의 재주가 신기했다. 돌이켜 보면 내 어린 시절은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시골에 살던 사촌 언니가 엄마를 돕는다고 우리 집에 같이 산 적이 있었다. 나이가 열 예닐곱 되는 언니의 이름은 또출이었다. 얼굴은 참 예쁜데 이름이 왜 그리 촌스러웠던 것인지.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를 돕는다는 말은 핑계고, 시골에서 연애하다 할아버지에게 혼나 쫓겨나서 우리 집에 피신해 있었던 듯하다. 밤중에 자다 오줌이 마려워 깨보면, 언니는 호야 불 밑에서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로 편지를 쓰고 있었다.

 아버지는 사십여 년 전 오십칠 세의 아까운 나이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생전에 아버지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으며 또 남 돕기를 즐겨하셨다. 시골 친척들은 아프거나 문제가 생기면 집으로 달려와 아버지를 찾았다. 외가 쪽 친척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집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아저씨도 있었고 결혼했다가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보따리를 싸든 채 피신해온 아지메도 있었다. 그 많은 객식구를 한마디 불평 없이 대접하는 것은 애오라지 엄마의 몫이었다. 날이 새면 먼저 대문을 열어두어 동네사람 누구든 우리 집을 내 집처럼 자유로이 드나들었다. 또 당시에는 귀하디귀했던 전화도 맘껏 쓰게 하여 인심이 후하다는 소문이 인근에 자자하였다. 

 사진에 함박꽃 웃음을 남긴 채 엄마는 올해 정초에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셨다. 두 분을 합장한 무덤 앞에 엄마의 영정 사진을 놓았다.  ‘엄마, 아버지 곁에서 편히 쉬세요.’ 간절한 딸의 염원을 들었는지 순간, 사진 속 엄마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명년 봄엔, 두 분의 보금자리에 두 분의 성정을 닮은 난초 꽃을 심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생활의 곤궁을  만날 때마다 나는 예의 사진을 꺼내 보는 버릇이 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들끓는 마음의 부유물이 가라앉고 영혼의 순도가 높아진다. 사진의 마력이다. 오늘도 방전된 마음을 충전시키기 위해 사진을 꺼내놓고 나는 시간의 굴렁쇠를 굴려 유년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20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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