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부터 짬짬이 시장을 보았다.
지난 추석에 지인의 소개로 소갈비를 샀었는데, 시중의 값보다 반 정도로 싼 값이어서 혹시나 맛이 덜할려나
걱정도 되었으나, 이외로 품질이 괜찮아 흡족했던 기억이 나서 이번 설날에도 쓸 갈비를 미리 샀었다.
그리고 그 그저께는 마트에 들려 물김치 거리와 만두속 감을 장만하였다. 또 전거리와 산적거리도 샀었다, 그제는 제수용 과일과 혹시 빠트린 물품이나 혹은 쓰다가 떨어진 물품을 보충하느라 시장엘 들렀다. 그리고 설날엔 떡국 제사를 올려야 하니 흰 가래떡도 준비해야 되었다.
일주일 동안, 시장을 연거푸 드나드는 내 모습을 하늘나라에 계신 시어머니가 내려다 보며 빙그레 웃으실것 같았다. '너두 별 수 없구만. 나이 들고 자손들 챙길려고 해보아라. 치맛자락에 바람이 일도록 휘돌아 쳐도 할 일이 태산이지?'
사십여년전 시집을 와서 처음으로 맞는 설날이었다. 설 전날 대구 시댁에 내려가니 시어머님은 몸살이 나서 누워 계셨다. 한달 전부터 설 쇨 준비 하시느라 시장으로 떡 방앗간으로 다니시고 그 많은 음식을 만드시느라 녹초가 되신 거였다.
제수 음식이야 어느 집이든 다 대동소이하게 장만 하지만, 떡의 종류를 보곤 휘둥그레진 눈이 풀리질 않았다. 흰 가래떡은 물론이고 콩 팥을 넣은 찰떡, 이스트를 넣고 부풀린 술떡, 녹두 고물을 뭍힌 기지떡, 콩고물을 묻힌 인절미 등등. 떡집을 차려도 되겠다는 탄성이 저절로 터져나왔다.
그 이후로 일년에 두번 설과 추석이 가까이 오면 나는 속으로 끙끙 앓기 시작했다. 물론 시어머님이 거의 다 준비하시지만, 맏며느리인 내가 시원시원 거들 형편도 못되고, 또 거들 능력도 없으니 죄스런 마음과 주눅든 기분으로 명절을 지내게 마련이었다. 은근히 스트레스가 쌓여 입을 댓발로 내밀곤 눈물을 찔금거린 적이 많았다. 보다 못한 시아버님이 음식량을 줄일것을 간곡히 건의 하셔서 그나마 떡이 두어가지 줄어들긴 했으나 일거리는 여전히 산더미 였다. 엄마의 만류(맏아들의 힘듦에 대한 염려)를 무릅쓰고 사대 종손에게 시집온
나의 어리섞음과 후회스러움에 마음이 괴로웠다.
나는 그 시절의 시어머니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어쩜 아까운 시간을 시장보는데 저리 빼았길까?
왜 저렇게 많은 음식을 힘들게 장만하여 작은집, 아들네, 딸네에게 바리바리 사 주셔야 직성이 풀리실까?
저런 세월을 보내시느라 당신은 꼭 부억떼기 형색을 면치 못하시고, 이제는 며느리인 나까지 그런 삶속으로 끌어들일려 하시니, 불만이 뭉글뭉글 피어올라 끝내는 부부 싸움으로 까지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정이나, 구정 연휴를 맞아 외국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디 먼 나라의 얘기였다. 외국 여행이 아니라, 국내 가까운 온천에라도 갈 수 있었으면 하는 나의 바램은 한번도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십여년이 지나고, 시어머님이 편찮으시면서 내가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나는 과감히 음식 가짓수를 줄이고 량을 줄였다. 떡은 떡집에서 사다가 썼다. 바쁘다는 핑게로 제사에 불참하는 시동생과 애들의 처지도 흔쾌히 양해해 주었다.
몸이 편해지면서 비로서 나는 제사나 명절 스트레스에서 조금씩 해방이 되는 마음의 여유를 찾게 되었다.
내 나이 오십 중반쯤이었을까?
어느해 설날, 차레를 모시고 난후 가족들이 모여 앉아 식사를 할때였다.
" 난 이제 명절에 여행도 가고 친정에도 가고 할래."
음복주를 마신 기운을 빌어 선전 포고 하듯이 내 뱉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남편이 멀뚱이 쳐다보는데, 큰아들이 "음식은 누가 장만하고?"하고 물었다.
"지음이(며느리)가 하던지, 아님 사다 쓰던지." 하니까 며느리가
"아이, 어머님, 저는 아직 못해요." 하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뒤 시동생이 거들었다.
" 아직 형수님이 한 오년은 현역으로 뛰셔야 될것 같은데요. 하하하"
모두들 안도하는듯 같이 웃었다.
그로부터 오년의 곱이 되는 세월, 십여년이 지난 작년 설에 세배 온 딸이
"엄마, 우리도 힘들게 집에서 명절 지내지 말고 따뜻한 바닷가로 여행이나 가지."하였다.
꼭 옛날에 내가 바라고 꿈꾸던 명절 탈피 프로그램이었다. 허나 나의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정말 어처구니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 그런 소리 말아라, 명절에 음식 장만하여 조상 섬기고, 또 너네들 거두어 먹이는 보람이 얼마나 큰데. 사람의 도리를 하고 살아야 옳은 삶이지. 좋지 않니? 이렇게 모두 모여 맛있게 먹고 화기애애한 시간 갖는게."
그 옛날 시어머님이 하셨던 말을 내가 스스럼없이 하고 있다니. 내 자신도 깜짝 놀랄 일이었다. 나의 사고가, 인생관이 언제 이렇게 바뀌었는가?
"모처럼 철 든 소리 하네."
남편이 기분 좋은듯 하하 웃으며 한마디 던졌다.
그믐날 꼭두 새벽 세시에 일어나 감주밥을 하고, 걸러서 갈아앉혀 놓았던 엿기름 물을 부었다. 대여섯 시간 지나면 삭은 밥알이 여남은개 동동 뜬다. 그때 끊이면 아침에 오는 손주들에게 먹일수가 있다.
수십년전의 시어머니의 행동과 똑 같은 짓을 하고 있다. 내가. 나는 그때, 자다 말고 밤중에 일어나 부산히 들락거리시는 시어머님을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못마땅했었다. 극성스럽다고 속으로 흉을 보고 원망을 하였다. 지금에사 나는 그 분의 마음을, 그리고 자손을 사랑하시는 정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의 생각과 생활관을 내 며느리에게 강요하지는 않겠다. 인생의 보람을 깨닫기에는 아직 나이가 어린 그애가 입을 내밀고 눈물을 찔끔거리는 모습을 내가 어찌 보겠는가? 나의 시어머님 보다는 신식인 내가 많이 현대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애들에게 말한다."내가 모든걸 다 할테니 너네는 와서 맛있게 먹기나 하라"고.
나는 우리 며느리가 올바른 인생관에 대하여 스스로 깨닫는 날이 올거라고 기대한다. 또 그 애의 됨됨이를 믿는다. 설마 힘들게 명절 준비하는 시어머니를 모른척 하고 외국 여행길에 오르는 철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201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