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산행기

황금빛 억새 위로 눈이 내리고

여해와담헌정 2009. 12. 7. 10:58

 황금빛 억새위로 눈이 내리고

                          

                                                     김 정연

 “어느 산에 갈까?” 집으로 데리러 온 친구가 차에 오르는 내게 묻는다. 일기예보엔 오늘 비 온다 했는데 생각하며 “억새 보러 갈까? 명성산” 하니 친구가 하하 웃으며 자기도 내심 명성산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바로 출발한다. 이 친구와 나는 생각이 절묘하게 같을 때가 많아 죽이 잘 맞는다.


 경기도 포천에 있는 해발 922.6m의 명성산은 산자락의 산정호수와 어우러져 운치가 뛰어나고 국민관광지로 이름 난 산이다. 산 전체가 암릉과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능선에는 초원지대가 펼쳐져 수도권 지역에선 억새로도 유명한 산이다.

 태봉국을 세운 궁예의 애환이 서린, 숨겨져 내려온 전설이 있는데 궁예가 망국의 슬픔을 통곡하자 산도 따라 울었다는 설과 왕건의 신하에게 주인을 잃은 궁예의 말이 산이 울릴 정도로 울었다는 설이 있고 또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입산할 때에 산도 슬피 울어서 울음산으로 불리우다 울 鳴, 소리 聲의 鳴聲山으로 이름 지어졌다는 설이 있다.


 산 초입에 들어서니 하나 둘 빗방울이 떨어진다. 우산 쓰기도 불편해 ‘가을비니까 많이는 안 내리겠지.’ 하며 윈드 쟈켓 후드만 뒤집어쓰고 산을 오른다.

 비선폭포를 지나 용이 하늘로 올랐다는 등용폭포에 이르니 빗방울이 제법 가느다란 빗줄기로 변한다. 한 숨 돌리며 주변을 돌아보니 온통 산은 운무에 휘감겨 있고 잎을 떨군 나뭇가지가 앙상한 모습으로 겨울의 스산함을 느끼게 한다. 그래도 이 산엔 소나무가 많아 그리 삭막하지는 않다. 날씨 탓인지 등산객이 많지 않아 무척 다행이다. 서울의 도봉산, 북한산 청계산 등은 휴일엔 장터를 방불케 한다. 무수한 사람들의 발에 짓밟혀 길섶의 풀과 나무들은 풀죽은 모습이고 왁자지껄한 소음에 산은 신음을 한다. 그래도 어이할거나, 세파에 찌든 인간들이 삶의 고단함을 산에 올라 훌훌 털며 위안 받으려는 욕망을 산은 엄마의 푸근한 가슴처럼 보듬어준다.


 아! 억새다. 환호와 같은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내리는 빗속에서 황금빛 물결이 춤을 춘다. 잡풀이 간혹 섞여 있고 제철을 지난 억새의 수술이 많이 떨어져 나가긴 했으나 군락을 이룬 억새는 짙은 운무 속에서 일렁이는 모습이 무척 신비롭다.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억새밭 사이를 오르고 있자니 어느 틈엔가 빗방울이 진눈깨비로 변하고 약간의 추위가 몰려온다. 능선 정상에 오르니 팔각정이 지어져 있고 그 옆에는 <일 년 후에 받는 편지>라는 문패를 단 빨간 우체통이 앙증맞은 모습으로 서 있다. 일 년 후에 받는 편지에는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까? 지금의 내 마음을 적어두면 일 년 후에도 변색되지 않는 의미로 읽힐까? 인간의 마음같이 간사한 게 없거늘 어찌 어제 오늘 내일이 여일하길 바랄까? 약간은 번잡한 생각을 잠시 해 본다.

 라면을 끓이고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억새 군락을 내려다보니, 진눈깨비는 어느새 하얀 눈송이로 변하여 온 산간에 하늘의 축복이 내려오는 진풍경을 보여준다. “환상이다.” 옆의 친구와 내가 동시에 환호성을 터트리니 “또 같은 생각” 하며 즐겁게 웃는다.

 눈발은 그쳤으나 짙은 운무가 온 산간을 덮어 적막한 겨울 산의 고즈녁 함이 우리의 온몸을 휘감는다. “해 떨어지기 전에 내려가야지.” 넋을 놓고 있는 나를 친구가 채근하여 우리는 자인사 방향으로 하산을 서두른다.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에다 울퉁불퉁 돌계단이 미끄럽기까지 하여 한발 한발 조심스레 발을 띄어 놓는다. 등산은 오를 때보다도 내려올 때가 더 위험하다. 긴장을 하니 아프지 않던 다리가 아파온다. 그래도 떡갈나무 낙엽들이 수북이 쌓인 흙길이 간간이 있어 긴장을 늦추고 가슴 깊이 숨을 들이키며 주변을 돌아보니 아, 예쁘기도!  소나무 가늘디 가느다란 이파리에 하얀 물방울이 총총 매달려 있다. 산간에 어둠이 내리고 기온 떨어지면 저 물방울들은 어여쁜 얼음 꽃으로 영롱하게 피어나리라.


 운무에 휩싸인 산봉우리 밑 멋진 암벽아래 자리 잡고 있는 자인사는 1949년 서울 명륜동에서 창건되어 1965년 5월 지금의 자리로 옮긴 절로써 현재의 터는 옛날 왕건이 궁예에게 반격을 가하기 전 여기서 산신제를 지내 산신의 도움으로 승전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라 한다.

 비 내리는 산사에서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독경 소리가 오늘따라 경건하게 마음을 파고든다. 대웅전 법당에 들어 참배하고 기도를 드리고 싶지만 번잡한 속세에서 마음속에 한가득 욕심을 갖고 사는 중생이 원하고 바라는 게 너무 많아 부처님이 ‘먼저  마음을 비워라’ 하실듯하여 그냥 맑은 샘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뒤 경내를 벗어난다.


 오늘 명성산 산행은 자연의 오묘한 모습을 두루 감상할 수 있는 기회까지 덤으로 주어진 멋진 산행이라 마음에 흡족함이 매우 크다.

                        (2009,11,29)

 

 


 

눈내리는 명성산 억새밭에서.zip

눈내리는 명성산 억새밭에서.zip
2.57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