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을 사는 마음
김 정연
유난히 추웠던 지난 겨울, 약국에 있던 화분 두 개가 얼어버렸다.
하나는 친구가 미국으로 떠나며 주고 간 수령 이십 년 쯤 되는, 친구를 그리듯 내가 자주 눈 맞춤하던 벤저민 분재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난 여름 ‘꽃 트럭’에서 산 ‘오로라’ 라는 관상용 식물이다. 붉은색과 주황색, 짙은 갈색 등 서너 가지 색깔이 어울려 풍기는 오묘한 느낌에 주저없이 구입했었던 나무였다.
화분을 난로 옆으로 옮기고 물도 정성스레 주고 하였지만 점차 시들시들해지더니, 끝내는 바짝 말라서 고목이 되고 말았다. 추운 날씨와, 부주의한 나의 게으름을 탓하며 마음이 아프던 차, 명년 봄이 되자 마을에 꽃 트럭이 다시 찾아왔다. 웅기중기 모여 있는 화분들 속에서 중간 키의 동백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었다. 활짝 핀 붉은 꽃 한 송이와 스무 나무 개쯤 되는 꽃망울이 나를 향하여 간절하게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불현듯 서정주의 詩 <선운사 동구>가 떠올라 갑자기 동백이 피고 있을 선운사에 가고 싶었다. 가서는 시인이 그랬듯이 나도 목이 쉰 주모의 육자배기 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항상 마음만 간절할 뿐이지, 약국에 얽매어 사느라 시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내 처지가 아닌가. 봄 앓이 하듯 심사가 울적해졌다.
'그래, 선운사에는 못갈 망정 내 이 꽃을 사서 선운사 동백 보듯 하리라,' 애써 마음을 달래며 이만 오천 원을 주고 구입해 책상 옆에 두었다.
우리 집에는 소철 나무가 두 그루 있다. 시아버님에게서 물려받은 수령 육십 년 한 그루와 큰 아들이 태어난 기념으로 우리 내외가 산, 그러니까 사십 년의 나이를 먹은 또 한 그루가 있다.
십 년 전 심장혈관 넓히는 시술을 하러 수술실에 들어가던 남편이 뜬금없이 유언을 하였다.
“은행 통장은 내 ‘007 가방’에 있으니 알아서 처리하고 큰 소철은 신영(딸)에게 주고, 작은 소철은 진수(큰 아들)에게 주도록 하시게”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별로 대수롭잖게 넘겨 듣고 말았는데, 나중에 수술이 잘되어, (사실 심장 혈관에 스텐트 넣는 시술은 결코 위험하거나 어려운 수술은 아니지 않는가) 완치된 뒤에 나와 애들은 킥킥 웃으며 유언을 화제 삼은 적이 있다.
"너네 아빠는 오죽 물려줄 게 없어서 화분을 물려준다냐?"
"아빠가 가진 게 별로 없으니 그렇지." 아들이 아빠를 옹호하고 나섰다.
"그래도 아빠가 애지중지한 화분이라 난 소중히 키울 생각을 했어" 딸이 거들었다.
오는 4월 막내아들이 결혼한다. 서른 일곱이 되도록 장가들 생각을 하지 않아 은근히 걱정이 깊었는데 맞선본 지 두 달 만에 결혼을 결심하고, 번개같이 날을 받아 일방적으로 통고해 왔으나 괘씸한 생각보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그날 이후 나는 막내에게 무엇을 결혼 선물로 줄까 생각하게 되었다.
옛날에는 동백처럼 오래 살고 동백의 푸르름처럼 변하지 않으며 많은 열매까지 맺는 동백을 다자다남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래서였겠지만 옛부터 초례상에는 부부가 백년해로하며 다복한 가정을 이루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대나무와 함께 동백을 자기항아리에 꽂기도 했다. 또 동백을 세한지우(歲寒之友)로 일컫기도 하는데 이는 겨울 끝물에 피는 꽃이기에, 인생의 겨울에도 따뜻하고 정답게 만날 수 있는 친구를 동백에 비유하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렇다. 내가 동백을 사고 싶었던 마음 저 안쪽에는 새 가정을 이루는 막내에게 동백에 새겨져 있는 의미를 물려주고 싶었던 속셈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 애들이 오순도순 정답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과 추운 겨울에도 꿋꿋이 견디어 내면서 붉은 꽃을 피우는 동백의, 세한지모(歲寒之母)의 뜻도 음미해 달라는 소박한 마음을 곁들여서.
문득 시아버님의 모습이 떠올라 한쪽 가슴이 쏴하니 아려온다. 십여 년 전 시아버님이 돌아가시며 우리에게 유산, 아니 유품을 몇 개 남겨주셨다.
항상 머리맡에 두셨던 자개 필통과 백여 년도 훨씬 넘은 나무로 만든 다듬이돌, 그리고 소철나무 등. 나는 그때 옹졸한 마음으로 그 분을 원망했었다. 남의 시부모님들처럼 집이든 땅이든 재산을 남겨주셨더라면 좀 더 살림살이가 윤택해지고 아이들 뒷바라지도 수월하게 할 수가 있었을텐데, 고작 무용한 골동품과 화분만을 물려주시다니....
평생을 교직에 계시면서 오남매를 대학까지 보내시느라 경제적으로 많은 고생을 하신 터라 자식들에게 유산을 남겨주지 못한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기는 커녕 원망만 늘어놓았다니. 소철의 기개를 닮아 꿋꿋하게 살아달라는 소박한 그분의 염원을 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변덕스럽기도 하여 소철을 유산으로 남기겠다는 남편의 초라함을 비웃던 내가 어느새 그의 마음을 닮고 있다. 또 인간의 마음은 여러 갈래이니, 선운사 동백이 생각나서이든 또는 막내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유산으로서든 동백나무를 산 의미는 애매모호 하지만 나는 요즈음 책상 옆에서 끊임없이 피고 지는 동백꽃을 보며 흐뭇한 기분을 느끼는 나날이 행복하다.
201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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