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방산과 정동진 푸른 바다
겨울 바다, 동해를 끼고 오르는 산은 대체로 부드러운 흙길이다.
바람도 잦아든 완만한 산행 길엔 고대하던 눈이 쌓여 있지를 않고 메마른 낙엽들만 발끝에 밟힌다. 작년 함백산 심설 산행의 신비로운 체험을 괘방산에서도 느낄 수 있겠지 하는 기대를 은근히 했었는데 올해는 아직 눈다운 눈이 내리질 않아 길섶의 마른 풀들만 눈 이불을 덮고 있다. 대신 겨울 햇살을 받고 금비늘을 반짝이는 푸른 동해의 잔잔한 물결을 관조하는 즐거움이 크다. 오른편 멀리로 겹겹이 둘러 쳐진 백두 대간 산들의 정경이 한 폭의 동양화 같다. 잎 떨군 빈 나무들 밑둥치에 흰 띠를 두른 하얀 눈의 적막감이 아득하다.
아득함에서 느껴지는 그리움이 가슴속으로 소리 없이 스며든다.
난 왜 이런 근원도 알 수 없는 그리움 땜에 가끔씩 아득해 지는가?
삼우봉에서 푸른 동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선배, 후배 뒤섞여 어께를 부딪치며 찍는 한 장의 사진에 우리들의 마음이 녹아 있겠지
반가운 마음, 신뢰하는 마음, 고맙고 든든한 마음, 여러 마음들이 어우러져 사진 속의 우리 군성인들은 행복한 미소를 띄고 있을거다.
산등성을 두어 번 오르고 내리는 조금 지루한 기분이 들 즈음 ‘당집’이 보인다. 울타리 안에 들어서니, 10회, 12회 선배님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 임진년 첫 산행의 건배를 외친다.
10회 선배님들은 오늘 무척 기고만장하시다.(계급장 떼고 하는 말, 실례)
올 정초에 무척도 추운 날, 악천후의 날씨를 무릅쓰고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맞이한 무용을 자랑하시느라 그저 희색이 만면하다.
참 대단한 분들이다. 평소에도 우리 군성 산악회의 정신적 지주이자 귀감이신 선배님들이 존경스러웠는데, 이번 지리산 산행으로 선배님들의 우의와 단결심, 그리고 도전 의식을 확인한바 존경심을 살짝 넘어 거의 경외심을 느낄 정도이다.(조금 지나친가? ㅎㅎ)
옆자리의 13회 선배님이 앙증맞은 병에 담긴 술(위스키와 꼬냑)을 두잔 주신다. 막걸리 뿐인 우리 15회의 밥상이 측은해 보였나 보다. 강병희 후배가 여기 저기서 노획한 반찬을 또 가져다준다.
바로 요런 맛이다. 짐이 없어 가벼운 배낭이니 힘들지 않게 산에 올라, 선, 후배한테 요것 조것 얻어먹는 술과 음식은 얼마나 맛이 짜릿한지 경험 해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거다. 너무 얌체 짓인가? ㅎㅎ
‘눈만 쌓였으면 멋진 산인데’ 투덜거리며 하산하니 바로 코 앞에 쪽빛 바다가 펼쳐진다.
하얀 배가 해변에 정박해 카페를 열고 있고 낮은 언덕에도 커다란 돛단 배가 하나 있다.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남기며 흰 파도의 포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모래시계를 보러 간다. 무척 커다란 조형물인 모래시계는 시간을 가리키지는 않고 그저 세월만 가리키는 모양이다. 안에 담겨진 모래는 움직임이 없는데도 일 년 동안 흘러내린다고 한다.
우리 눈에도 흐르는 세월은 보이지 않듯.
시골 간이역, 정동진 역사를 통과해 해변으로 나오니 우리의 만년 총장 민서가( 돈 많이 생기라고 개명 하였다 하는데, 갑부 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생선회를 준비해 놓고 있다.
맑은 술 한잔에 회 한 점 먹으며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면 암회색의 하늘과 짙은 청록색의 바다가 맞닿아 쓸쓸한 겨울 색이 되어 있다.
좀 쓸쓸하고 적막해야만 겨울의 낭만이 느껴지는 건 나만의 생각인가?
파도에 실려 온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조금 추운 듯 해 옷깃을 여미고 친구들과 담소하며 마시는 술은 달콤함이 혀끝에 돈다. 다시 마음이 훈훈해 진다.
눈이 푹푹 내리는 날, 다시 강릉엘 오고 싶다.
눈 쌓인 괘방산을 오르며 빈 가지와 소나무 가는 이파리에 피어 난 눈꽃을 보고 싶다.
모래사장의 눈길을 밟고 저 언덕의 흰 돛단배로 가서 커다란 창문을 통하여 눈 내리는 바다를 바라 볼 것이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닦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벗은 청마의 시를 읊을 것이고 나는 벗의 마음을 느낄 것이다. 눈은 폭폭 내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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