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보고 세다고?
김 정연
“엄마 이름의 획이 별로 안 좋아서 도장을 새로 만드는 게 좋대요. 내가 하나 파드릴게.”
병원에 근무 하는 딸이 전화로 하는 얘기다.
두어 달 전, 진료실에 온 환자가 딸애의 명패를 보곤 고개를 갸우뚱 하며
“선생님의 성함 박 신영 중 영(暎)자가 별로 안 맞는 획인데, 이 자로는 선생님의 명성을 이만큼 이루기는 어려운데 이상합니다.” 해서 이만큼의 명성이란 말에 딸애가 좀 계면쩍기도 하였으나 궁금한 마음이 생겨 “그럼 무슨 자가 맞느냐? ”고 물으니 “비칠 영(映)이 제대로 입니다.” 하였다는 것이다.
혹시나 하여 호적 초본을 떼어보니, 놀랍게도 호적에는 엄연히 비칠 영(映)자로 올려져 있었다며, 엄마나 아빠가 자기 한자 이름을 잘못 가르쳐 주어서 이때까지 엉뚱한 글자를 써 왔다고 항변을 하였다.
그 뒤로 딸애는 그 작명가의 신봉자가 되어 사위와 외손녀 이름을 새로 지어 지금 법원에 개명(改名) 신청을 해 놓은 상태이다.
어떻게 그 사람 말을 다 믿을 수가 있나, 의구심이 들지만 이름 땜에 운명이 안 좋을 거라는 말을 듣고 무시할 수 있는 강심장들이 아니어서 우리는 벌써 외손녀 옛날 이름인 원경이 대신 승연이라 부르고 있다.
“내 이름이 어때서?”
“아빠 엄마 이름을 말했더니, 단번에 아빠는 돈 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고 엄마가 돈 벌어서 우리들 교육시키고 다 키우는 팔자래요. 희한하게 맞지 않아? 그리고 엄마가 너무 세대.”
약국에 손님도 있고 하여 더 이상 긴 통화를 못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문득문득 딸애의 말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하기사 돈 하고는 거리가 멀지. 잘 다니던 대기업 차장직을 하루 아침에 그만두고(결혼 4년차 쯤) 오퍼상을 차려 무슨 대단한 수출 역군 마냥 동분서주 하며 보낸 세월 십여 년 동안 타협할 줄 모르고 원리원칙을 신조로 삼은 사람이 어떻게 성공할 수가 있었겠는가?
회사를 접고 뒤늦게 다른 회사에 취직을 해서는 기존 맴버들의 꼬락서니(남편의 표현)가 아니꼬와서 도저히 못 보던 독불 장군이니 어찌 견딜 수 있었겠는가?
구멍가게 같은 약국을 열어 놓고, 애들 키우랴, 남편 뒷바라지 하랴, 참으로 고난한 세월을
보낸 날보고 ‘세다고?’
40여년을 융통성 없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소심한 남편을 모시고 두 살 터울의 3남매를 훌륭히 (내 친구들이 한 말)키워 내느라 센 여자가 되었을 거란 말에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어릴 때부터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데다 자존심이 좀 센 편이긴 했다. 허지만 아내의 팔자가 세면 남편이 그 기(氣)에 눌려 성공하지 못한다는 속설의 의미로 딸애가 말하는 것 같아 은근히 기분이 언짢다.
언제 만나서 시시비비를 가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부글거리는 속을 달랜다.
딸이 만들어 준다는 도장 하나를 더 보태면 내게는 인장이 무려 여섯 개나 된다.
검은 상아의 인감도장, 옥으로 만든 은행도장(요즈음은 사인으로 대신 하지만), 약국에서 처방전에 찍어주는 막도장, 또 2년 전에 도장 새기는 기술을 배웠다고 중학교 친구가 선물한 내 아호 도장, 그리고 등단 축하로 임헌영 교수가 만들어 준 연한 벽돌 빛 도장.
그런데 딸이 새로 새겨주는 도장은 어디다 쓴담?
그래, 이 참에 편지를 쓰자. 설합 속에서 잠자고 있는 만년필을 꺼내 파란 잉크를 넣어 핑크빛 예쁜 편지지에 그리운 마음과 보고픈 마음을 적고 맨 나중에 도장을 꽉 찍어 보내자.
아들, 딸, 며느리, 손주, 그리고 친구들에게. 손으로 꼽아보니 열손가락이 다 모자란다. 모두들 내 편지를 받곤 ‘글씨도 잘 쓰네.’ 하며 감격해 할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슬슬 좋아진다.
얼마 남았는지 모르는 여생이지만 큰 병 앓지 않고 애들 키울 때 마냥 아등바등 약국일 안 하고도 여유롭게 살 수 있고 또 글도 술술 잘 씌어져 남들 앞에서 좀 우쭐거려도 좋을 일이 생길 수도 있을려나? 은근히 욕심을 내는걸 보니 나도 어느새 그 작명가의 신봉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2011, 7.
'그룹명 >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비금리에서 여중 동창회 (0) | 2012.05.19 |
|---|---|
| 새해에 읽는 詩 (0) | 2012.01.10 |
| 유행가를 부르고 싶은 밤 (0) | 2011.07.26 |
| 우리의 자존심 손상죄 (0) | 2011.07.07 |
| 비 내리는 날엔 '마야'엘 간다. (0) | 2011.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