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산행기

눈 깊은 산을 가다

여해와담헌정 2011. 4. 6. 16:07

 눈 깊은 산을 가다


                                                           김 정연


 상고대를 보셨나요?

 가느다란 나무 가지에 하얗게 피어나는 투명한 얼음 꽃.

 보통은 안개 짙은 호숫가, 또는 겨울 산자락에 이른 아침 영롱하게 피었다가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흔적 없이 사라지는 일명 나무 서리라고도 불리우는 겨울에 피는 꽃입니다. 나는 혼자 빙화氷花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그런데 함백산 정상 부근에서 만난 상고대는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추어도, 또 눈발을 흩날리는 바람에도 사라지지 않고 어린 가지 끝에 단단히 매달려 있는 작은 눈물방울 같은 모습이 너무 어여뻐 아련한 슬픔이 밀려들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오래 지속되지 않고, 또 길게 머무르지 않는 아쉬움 때문에 더욱 애절한 마음이 되는 것 같아요. 우리의 젊음과 열정이 그리하듯이.

 까탈스러운 길을 힘겹게 올라 정상에 다다르자 날씨가 심술을 부리는군요.

 함백산,1572.9m라고 씌어진 표지석도  눈발을 흩날리며 세차게 부는 바람에 떨고 있습니다. 나뭇가지나 사철나무 잎 위에 머물러 있던 눈송이들이 후두둑 떨어집니다.

 백두대간의 산등성이들이 굽이굽이 물결지어 흐르는 모습이 멀리로 아득하게 보입니다. 잠시 아득함에서 느껴지는 그리움 땜에 가슴이 시려 옵니다. 왜 나의 이 근원을 알 수 없는 그리움은 빙화처럼 햇살에도 사그러들지 않고 찬바람 속에 더 영롱해지는 건지요.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정상을 넘어서 두문동 재를 향하는 설원에서 흰 양탄자 같은 눈을 밟으며 문득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의 첫 소절이 생각났습니다.

 고등학교 때 그 소설을 처음 읽으며 허무주의적이고 미의식이 가득한 문학성에 매료 되었지요.

 그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까지 탄 작가는 1972년 가스를 마시고 자살을 합니다. 그의 문학세계나 생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 했어요. 그 당시는 우리가 청춘일 때죠. 모든 게 찬란했던 청춘이 이미 40년이나 먼 곳으로 밀려나 있군요.

 대구에서 나서 자란 나는 이렇게 많은 눈이 쌓인 걸 처음 보았습니다.

 다져진 눈길이라지만 그래도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걸으며 스틱으로 사람 발길 닿지 않은 곳을 푹푹 찍어 봅니다.  길 옆의 나무들 밑둥은 물론이고 몸통들이 서너 자도 넘게 눈 속에 잠겨 있습니다. 하얀 눈밭에서 뒹굴고 싶은 마음이 마냥 생기니 아직도 철이 덜 들었지요?

 바람이 슬몃 잦아든 주목단지 능선에서 1000년 세월을 견뎌낸 고사목들을 만납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허허롭게 서 있는 고사목과 주목에게서 세월의 상처를 한사코 이겨낸 숭엄함이 느껴집니다.

 얼마 전 세상을 뜨신 작가 박완서님이 생각나는군요. 시대의 상처와 고통을 삶으로 곱씹은 탁월한 이야기꾼인 그의 등단작이 <<나목>>이어선지 더욱 사람들은 그를 그늘이 깊은 나무로, 그 그늘에서 쉬며 위로 받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천진한 웃음이 회색빛 가지 위에 핀 눈꽃을 닮았어요. 나목의, 인간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정다움같이.

 갈참나무, 흰 박달나무의 커다란 몸통이 뻥 뚤려 있습니다. 속을 완전히 비워낸 메마른 갈색의 그림자만 구새 속에 가득합니다. “나무가 죽었네.” 하고 외치니, 죽은 게 아니고 나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 속을 다 비운 거라고 선배가 일러 줍니다.

 놀랍습니다. 생명을 지탱해 가는 나무의 자생력이. 얼마나 긴 인고의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했을까요? 저 나무는. 자연의 힘과 경이로움 앞에서 우리 인간의  미약함을 다시 한 번 느낍니다.

 샘터로 갈라지는 곳에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군요.

 키 큰 나무 아래 모여 서서 막걸리를 한잔씩 마십니다. 뒤따라 내려오는 선배님들과 사진도 찍습니다. 모두들 심설산행을 만끽한 흡족함이 얼굴에 나타납니다.

 조금 전까지 심술을 부리던 날씨가 환히 웃습니다. 밝은 햇살에 봄기운이 스며 있네요

 겨울 계곡의 얼음짱 아래로 졸졸 눈 녹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봄을 기다리는 성급한 마음이 귀를 깨우는 환청일지도 모르겠군요.


 정암사 적멸보궁 앞마당에서 합장 배례 하고  수마노탑을 올려다봅니다.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쌓아 올린 모전 석탑이 눈 쌓인 빈산 능선을 배경으로 허공 속에 우뚝합니다.

 경건하게, 경외심으로 기도를 합니다.

 무엇을 기도 했냐 구요? ‘그저 마음을 비우게 해 주세요’입니다. 항상 저의 기도는.


              2011, 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