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짝꿍은 영원한 짝꿍이다!.
김 정연
오늘로써 선생님을 못 뵈 온지 두 달이 됩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사람의 몸과 마음은 쉽게 길들여지는 타성이 있어서(제 경우입니다.) 옆자리의 허전함이 마음까지 어지럽힙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정신 집중하여 열심히 듣긴 하나, 아차 순간 신경이 흐트러져 놓친 칠판의 글자를 컨닝 해 다시 베껴 쓸 수 없음도 참 아쉽네요. 선생님께만 하는 얘기지만 우리 교수님의 글씨가 워낙 날림이잖아요. 더욱이 漢字는.
작년 유월, 강의실에 제가 첫 발을 내딛었을 때, 눈썹이 특이하게 생기신 교수님이 “의사와 약사 궁합이 맞겠다.” 하시며 제 짝꿍으로 선생님을 지목하셨는데, 선생님 왈 “나는 바쁜데요.” 하시며 튕기시데요. 저는 혼자 생각으로 ‘짝꿍 되면 개인적으로 자주 만나고, 그래서 글 쓰는 개인지도를 받는가 보다.’ 했었지요. 그래서 얼굴도 미남이신데다 인자한 큰오빠 같은 느낌의 선생님이 제 짝꿍 되신 걸 행운으로 여겼어요. 동창회 가서 선생님 자랑을 막 했더니, 남자 동창들이 은근히 질투까지 했다니까요. 근데 웬걸요, 바쁘기는커녕 강의실에서 고작 옆자리에 앉아 같은 접시에 담긴 간식거리나 나누어 먹는 사이란 걸 곧 깨닫고 많이 실망했지요. 하하. 이럴 때 보면 저도 참 대책 없이 순진하다니까요.
그러나 그 실망감은 잠시, 선생님의 자상한 마음 씀에, (일테면 선생님의 수필집을 두 권 이나 주시고 읽어 보아야할 좋은 책을 추천하시는 등 선배님으로써의 지도 편달을 성의 있게 하시는) 고마운 마음 무척 컸습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 ‘강둑길’ 있잖아요. 그 걸 읽으면서는 ‘아, 우리는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나 보다.’ 저 혼자 감탄도 했어요. 작품 주인공 이름이 ‘정연’인데다, 사는 곳도 휘경동이라 하니 제가 놀랄 밖에요.
선생님, 선생님은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 나가시데요.
김 인순씨 개인전 열린 날, 모처럼 저녁 시간을 내었으니 다른 문우들과 함께하는 자리지만 선생님과 제대로 술 한 잔 할 수 있겠다 하는 바램으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었는데, 세상에나 어지간히 저녁 식사가 끝나고 반주가 아닌, 본격적인 술판이 벌어 질려는 찰라 선생님은 저 건너편 김 인순씨 여고 동창들 자리로 가버리시데요. 이럴 수가! 김이 팍 센 우리 화요 반 문우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기분만 안고 서둘러 뿔뿔이 헤어졌지요.
지금만 같아도, (그때는 제가 초짜여서 감히 무어라 불평을 할 수도 없는 처지라) 의리 없이 배신 때리는 선생님을 그냥 두었겠습니까? 하하
그리고 여름 학기 방학 중 도봉산 산행 때 얘길 해야겠어요.
하산 후 두부 집에서 몇 순배 술잔이 돌아 흥이 오르니, 평소에는 공자의 수제자 이신 조 현상 선생님도 옛 시절의 무용담을 고백하시며 화기애애한 판에 선생님은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술만 드시더니 자리를 파하고 밖으로 나와서는 서둘러 헤어지자고 하시더군요. 저는 사실 2차 3차 가서 약국이야 누가 떠메 가지 않고 잘 있겠지, 내 알바 아니다 라는 배포로 도봉산에서 받은 기를 맘껏 발산하려고 마음먹었었거든요. 졸지에 어미닭 잃은 병아리가 된 인순씨와 성자씨 또 저는 잠깐 멍했지요.
‘평소 산에 같이 오르는 여자 친구가 생각나시나 보다.’ 인순씨의 해석에 저는 엄청 속이 쓰렸어요. 덕택에 약국 와서 말일 업무 잘 처리하고 조신하게 시간 보냈습니다만.
다음 화요 수업일에 제가 물었지요. 왜 빨리 가셨냐고.
실수 할까 봐 그랬다.는 선생님의 변명을 듣고는 그제사 저의 쓰린 속이 갈아 앉데요. 이 대목에서 저는 또 남자의 깊은 속을 잘 헤아리지 못하는 우매함을 늬우칩니다. 하하
선생님, 지금에사 고백하건데, 새로운 신입 회원이 들어 올 때 마다 제가 얼마나 가슴 조리는지 아시나요? 혹시나 교수님이 유능한 선생님을 새내기 짝꿍으로 바꿔 버리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에 교수님 눈치를 힐금힐금 살피고 잠시 동안 숨을 죽입니다. 다행히 아직 까지는 그런 불상사가 없지만, 언제 교수님의 마음이 바뀔지 심히 불안하네요. 우리 교수님의 모토가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한번 짝꿍은 영원한 짝꿍이다.’ 라고.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한가로운 오후입니다.
어린 아이들 진료하시는 인자한 할아버지 모습이 보입니다. 젊은 엄마들에게 가끔 농을 하시며 편안하게 대해 주시는 모습도 상상됩니다.
선생님, 十八史略 공부할 때 저더러 口密復劍 같은 사람이라 하셨지요? 가볍게 하신 말씀 인줄 알지만, 하기사 한 번도 저와 선생님이 허심탄회 마음을 열어 대화를 나눈 적이 없으니 저를 그런 식으로 잘못 보실 수도 있지요. 그럼 어떻게 저의 참 모습을 보여 드리나?
맞아, 이렇게 하면 어떨가요? 어는 깊어가는 가을 저녁 선생님이 일 하고 계시는 보건소로 쳐들어 갑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납치하여 맛있는 밥과 입에 짝짝 들어붙는 술을 사 드리겠어요. 서로 잔을 부딪쳐 “짝꿍을 위하여!” 구호도 외치구요.
달빛 고운 가을 밤 즐거움이 철철 넘칠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근데, 아뿔사 선생님, 제가 선생님 납치하는 작전 짜느라 흥분해서 그만 지갑을 깜빡 빠뜨리고 왔지 뭐예요. 죄송하지만 선생님이 아르바이트 하신 돈으로 계산하시면 안 될까요?
구밀복검 누명 벗으려다 꼼짝달싹 못하게 낙인찍히는 제 꼴, 아이구 한심해. 하하하.
웃음소리에 놀랐는지 갑자기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는군요.
비 내리는 가을 오후 참 좋은 날입니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2010, 09, 09.
김 정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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