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 산행기
김 정연
“후배님, 일찍 나오시네요.” 이일순 선배가 반갑게 맞으며 손부터 잡는다. 푸석한 얼굴에 울긋불긋 붉은 기가 도는 걸로 보아 간밤에 약주를 많이 드신 듯 해 “선배님, 지난밤에 매우 즐거우셨군요.”하고 인사를 하니 “아니, 어떻게 아시오?” 하며 놀란다. “제가 아침에 술 깨는 약 사러오는 사람을 어디 한두 명 봅니까? 하하”
그동안 서울 경대 사대 부속중고등학교 군성 산우회 동창들은 매달마다 하는 산행으로 인해 선후배간에 정이 많이 들었다. 오늘도 예외가 아니어서 서로서로 반가운 인사들을 나누느라 시끌벅적 한바탕 장바닥을 이룬다. 인사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으며 ‘15회 동기 누가 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옆자리에 배낭을 놓아 자리를 하나 확보해 놓는다.
아니 이럴 수가! 차는 출발하는데 15회에서는 나 외엔 한 사람도 안탄다. 실망스러운 참에 다행히 군성회의 미남 18회 준수씨가 와 옆자리에 앉는다. 이게 웬 횡재람, 닭 대신 꿩이다. 더더구나 3년 후배가 아닌가! 후후. 어젯밤 무슨 꿈을 꾸었더라? 준수씨가 mp3로 좋은 음악을 선별해 귀에 꼽아 주는 둥 살갑게 군다. 많은 누나들 틈에서 자란 사람이라 무지 다정다감하다.
버스는 세 시간 가까이 달려 봉화 청량산 들머리에 닿는다. 산우회 회장이 하는 산행 안내를 들으니 별반 힘이 들것 같질 않다. 고 정도는 하겠지 하는 자신감을 안겨 준다.
허나, 웬 걸! 차에서 내려 입석 등산길 초입부터 사람 물결이 계속 너울거리고, 우리 일행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바삐 걷다 보니 벌써 다리가 뻐근해온다.
어찌하누? 걱정이 되는 찰나 뒤에서 들리는 반가운 구원의 말씀, "환자 한 명 있고 보호자 한 명, C조 편성합니다." 돌아보니 김상기후배가 보호자 이성희 후배의 팔을 잡고 절뚝거리며 따라온다. 무조건 가입이다. 안성맞춤, 내가 약사 아닌가? "간호사 자청합니다."
이리하여 김상기후배(발목 인대 손상,2주 진단서 확보)와 이성희 후배, 그리고 나는 C조가 되어 유유자적 산행을 계속한다.
아름다운 산이다. 최고봉인 의상봉(장인봉)을 비롯해 보살봉(자소봉) 금탑봉 연화봉 축용봉 등 12개의 암봉이 총립해 있고 봉마다 대(臺)가 있다. 자락에는 8개의 굴과 4개 약수, 내청량사(유리보전)와 외청량사(응진전)외에 퇴계의 사당인 오산당(청량정사)등이 있는 영남 굴지의 명산이다. 오르다 쉬며 뒤 돌아 보면 가까이로 멀리로 기이한 모양의 암봉과 층암절벽이 울긋불긋 든 단풍으로 수놓은 병풍같이 둘러 처져 시야에 가득 찬다. 봉마다 기암이요 돌마다 괴석이다. 건듯 부는 바람에 옻나무, 산 벚나무 굴참나무의 단풍든 노란 잎들이 흩날려 떨어지거나 하늘거리며 어깨 위에, 머리 위에 툭 또는 살포시 내려앉는다. 기암괴석 곳곳에 가을이 어여쁘게 물들어 있다. 퇴계가 자신의 시조에서 "청량산 육륙봉을 아는 이는 나와 백구뿐"이라고 읊은 데에서도 잘 나타나듯 청량산 산세는 참으로 절경이다.
두 후배의 여유가 즐겁다. 뒤에서 올라오는 사람에겐 어김없이 길을 비켜 주고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에겐 꼭 인사를 챙긴다. 몇 시에 오셨느냐? 어디서 오셨느냐? 꼭대기까지 다녀오시느냐? 자상하기도 하다.
금탑봉이 병풍처럼 둘러선 깎아지른 수직 벽 아래 응진전 문 앞엘 오니 주인장이(아마 스님이겠지) 기왓장에 이렇게 써 놓았다. "지금은 부재중이오니, 아래 전화로 연락 주세요. 011-ㅇㅇㅇ-ㅇㅇㅇㅇ", 바로 원효대사가 머물렀다던 곳이다. 기와 한 장이 집을 지키는 고적감은 조금 옆에 떨어져 있는 무위당(無爲堂)에도 감돈다.
자란봉을 향하여 오르는 길은 꽤 가파르다. 한 순간 현기증이 일어 눈앞이 하얘지고 머릿속이 빙글 도는 듯 해 염체 불구 좁은 산길에 주저앉으니 두 후배가 깜짝 놀라 달려든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하며 물을 마시게 하고 초콜릿을 입에 넣어 준다. 자칭 간호사가 환자와 보호자에게서 보살핌을 받다니, 체면 다 구긴다.
앞서 간 일행들을 부러운 눈으로만 뒤쫒던 우리 C조는 선학봉을 건너는 구름다리를 포기하고( 정말 눈물겨운 아쉬움이다.) 청량사로 방향을 잡는다.
풍수지리학 상, 길지 중의 길지로 꼽히는 청량사는 육륙봉(12봉우리)이 연꽃잎처럼 둘러싸고 있는 연꽃 수술 자리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 문무왕 3년에 원효대사가 세운 절로써 공민왕의 친필인 현판, 유리보전(琉璃寶殿)과 종이로 만든 지불(紙佛)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유리보전이란 약사여래불을 모신 곳이란 뜻이라고 후배가 일러준다. 삼각 우총(세 갈래로 가지가 뻗어 있는 老松) 그늘에서 잠시 쉬며 지현 스님의 시 한 수를 읊조린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꽃이 필까 잎이 질까
아무도 모르는 세계의 저쪽
아득한
어느 먼 나라의 눈 소식이라도 들릴까...
안심당엘 들려 커다란 전망 창을 통해 산을 내려다보니 청량산의 정감이 마치 인간사 잡다함을 가슴에 품어 다독이는 어머니의 품속같이 포근하다.
“자, 내려가서 곡차 한잔 해야죠.” 후배의 재촉. 해서 자리 잡은 곳이 ‘들꽃 피는 가게’ 한쪽 자리. 빈속에 동동주 한 사발을 쭉 들이켜니 가슴이 쏴하니 터진다. 청량산의 가을 정취를 맘껏 느낀 덕에 입이 달다.
후배들은 단번에 옆 자리의 사람들과 (그 팀도 초등 동창 산우회) 친해져 술잔이 오고 간다. 화장실을 다녀오니 "예쁜 언니 이리로 좀 오이소." 하며 초면의 옆 팀들이 나를 부른다. 예쁘다 하는데 안 넘어 갈 수가, 더더구나 동동주 몇 잔에 알딸딸한 기분이어서 옆에 가 앉으니 악수를 청하고 손을 쓰다듬고 난리다. 오늘은 아침부터 손을 잡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가. 그들이 떠난 후 후배 왈 “제가 선배님 손잡으면 승진도 하고 좋은 일 생긴다고 했거든요. 하하.” 이래 과대광고 하면 공정거래에 안 걸리나? 정말 못 말려.
뒤 늦게 하산하는 다른 동창들과 반갑게 해우하고 바람 잦아드는 청량산 가을볕을 등 뒤로 서울로 향한다. 오늘의 산행은 유유자적 앞 뒤 옆 다 살펴가며, 낯 선 이들과도 잠시 동무되고, 느린 듯 여유로운 행보여서 더 만족스러웠다고 자평해 본다. 우리의 여생도 이런 모양이면 좋겠다고 염원을 한다.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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