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이야기

변덕부리는 봄날

여해와담헌정 2010. 4. 26. 13:22

변덕부리는 봄날

                               

                                                            김 정연



 '우르릉 쾅 쾅' 갑자기 날이 흐려지며 하늘에서 천둥소리와 비바람이 몰아친다. 가로수 벚나무가 심하게 흔들리며 분홍색 어여쁜 벚꽃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온통 아스팔트와 보도 블럭은 떨어져 누운 꽃잎으로 예쁜 꽃무늬 장판 같다.

 올해 봄은 유난스럽다. 겨울의 끝자락을 쉽게 놓치지 못하고 올 듯 말듯 망설이다가, 삼월 들어 두어 차례 눈이 내리며 매서운 꽃샘추위로 온 삼라만상을 얼어붙게 만들더니, 그예 사월도 그믐에 가까운 오늘, 비바람을 몰고 천둥까지 치는 고약함을 보여준다. 패악질을 부리는 심술쟁이 강청댁 같다.(강청댁은 박경리의 소설<<토지>>에 나오는 이용의 아내다.)

 지난겨울의 찬 공기에 예민해진 코와 귀가 병이 들어 코는 ‘알레르기성 비염'에, 귀는 소리가 울리는 ’이명'에 시달리고 있다. 윗 층의 병원에 두어 번 다녀도 별로 호전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이비인후과를 개업하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 했더니, "너 술 마셔서 안 낫는다. 술 끊고 약을 열심히 먹어 봐."한다. ‘돌파리 같으니, 내가 뭐 맨 날 술 마셨나?' 궁시렁 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40여년을 의사 노릇하는 친구의 말이 맞지 싶어서 약만 열심히 먹었다. 조금 나아진 듯하지만 , 내 생각엔 추위가 물러가고 날씨가 따뜻해져서이지 약 땜에 좋아 지는 건 아니지 싶다. 약사인 내가 이리 약을 불신해도 되는가? 돌파리는 바로 나인 것 같다.

 그런데 오늘 또 날씨가 변덕을 부리니 나의 코와 귀도 문제지만 오늘이 '한국 산문' 총회 일인데 날씨가 부조를 안 하는 듯 하여 괘씸한 마음이 든다. 일 년에 한번 하는 우리의 큰 잔칫날을 이리 심란 스럽게 만들다니.

 

 길 위에 떨어져 누운 꽃잎이 비에 젖는 모양이 애처롭다. 50여 년 전, 청와대 뜰에도 벚꽃 잎이 난무하여 중3 수학여행을 간 우리(경대 사대 부족 중)는 그 황홀한 정경에 넋을 빼앗기고, 그때도 비가 내렸던 듯, 분홍색 이파리가 점점이 박힌 파란 비닐우산을 쓰고 사진들을 찍었다.

 "김 정연 나하고 사진 한번 찍자." 뒤에서 들리는 변성기 남학생의 목소리는 J다. 그 애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키가 크고 미남인데다 공부도 잘 하니, 또 탁구부 주장이고 문예반 반장이다. 얼굴이 빨개진 나를 두고 친구들이 놀리며 채근했다. "정연아 좋겠다. 빨리 사진 찍어라."

 그날 이후로 나는 핑크빛 연정에 물들기 시작했다. 매일 쓰는 일기장엔 온통 그 애의 얘기  뿐이고, 학교에서 가끔 마주 칠 때면 가슴이 콩닥거려 숨을 잘 쉴 수도 없었다. 아침 조회 시간이나 단체 운동 시간엔 그 애의 모습을 찾기가 바쁘고 그 분주한 시선을 친구들한테 들킬까봐 전전긍긍했다. 

 서 너 번 그 애는 우리 집엘 찾아왔다. 대문 밖에서 '목련꽃 그늘아래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면 내가 나가서 둘이서 어두운 담벼락 그늘에서 얘기를 나누곤 했다. 빵집 같은 델 갈 줄도 몰랐고 또 가서는 안 되는 시절 이었다. 일요일엔 괜히 공부를 한답시고 학교엘 가서 먼발치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만 할 뿐이었다.(친구들이 항상 같이 있었으므로)  덕택에 공부에 별 취미가 없던 내가 성적이 향상되어 반에서 10등 안에 들었다.

 고교 진학을 그 애가 서울의 K고로  하는 바람에 우리의 인연은 서서히 끝나게 되었다. 처음 몇 번은 편지가 오고 갔는데 차츰차츰 그 애에게서 편지가 안 오는 거였다.  어린 내가 받았던 마음의 상처가 무척 컸었나 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고 꿈 많던 시절인 고등학교 1,2년을  거의  삭막하게 보내었던 것 같으니.

 

 그 사진을 그 후 40년 후에 보게 되었다. J가 동창회에 갖고 나온 것이다. 까까머리의 머슴애와 단발머리의 가시내가  어색한 폼을 하고 파란 비닐우산 속에 있었다.

 "이걸 여태 갖고 있었나?" 놀라 묻는 나에게  “첫사랑을 어찌 잊을 수 있나?” J의 능청스런 대답에 친구들은 야유를 보내고 그날의 동창회는 무척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까마득히 먼 옛날의 회상에 젖어 있는 사이, 날씨는 또 변덕을 부린다. 비가 그치고 햇살이 밝게 비춘다. 꼭 도깨비장난 같은 날씨다. 걱정스러웠던 내 마음도 평온해진다. 나의 코와 귀도 큰 말썽을 안 부릴 것 같고, 우리 문학회 총회도 성대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잘 치루어 질 것이므로.

          2010,4, 23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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