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중랑천 둑방길을 걸었다. 동녁 아차산 뒷쪽에서 솟아 오른 태양의 밝음이 눈부시고 봄 기운이 완연하여 살랑이는 바람도 정답다. 벚꽃나무를 올려다 본다.이틀전 보다 한결 부풀어 오른 분홍색 꽃망울이 오늘 내일 따사로운 햇살의 애무에 '아이, 간지러'하며 활짝 터질듯한 모양새다. 매년 긴 터널을 이룬 벚꽃 길을 걸을때쯤엔 나의 중 3 옛 시절이 한번씩 생각난다.
"김 정연, 사진 한번 같이 찍자."
등 뒤에서 들리는 변성기 남학생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J가 소리 없이 내리는 봄비에 파란 비닐 우산을 쓰고 나를 보고 있다.
중학교 졸업 여행을 서울로 온 경대 사대 부속중학교 3년생인 우리는 청와대로 견학을 갔었다.청와대 입구에서 현관까지 들어가는 긴 길을 벚꽃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때마침 바람을 실은 봄비가 내리니 하얀 벚꽃잎이 분분이 날리며 파란 아스팔트 위에 떨어지는 아름다운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을때 였다.
"야, 정연아 좋겠다.빨리 찍어라" 얼굴이 빨개지는 나를 보고 친구들이 놀려댔다. J는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많다. 공부도 상위권에 들며 키가 훌쩍 큰 미남인데다, 탁구부 주장이며 또 문예반 반장이다.(나는 부반장)
벚꽃잎이 하얗게 떨어진 비닐 우산을 쓰고 어색한 폼을 지으며 사진을 찍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핑크빛 연정에 물들기 시작했다. 매일 쓰는 일기장엔 온통 그애의 얘기 뿐이고, 학교에서 가끔 마주 칠때면 가슴이 콩닥거려 숨을 잘 쉴 수도 없었다.아침 조회 시간이나, 단체 운동 시간엔 그애의 모습을 찾기가 바쁘고 그 분주한 시선을 친구들한테 들킬까봐 전전긍긍했다.
한 서너번 그애는 우리집엘 찾아왔다. 대문 밖에서 '목련꽃 그늘아래서...'휘파람 소리가 들리면 내가 나가서 둘이서 어두운 담벼락 그늘에서 얘기를 나누곤 했다. 빵집 같은델 갈 줄도 몰랐고 또 가서는 안되는 시절이었다.일요일엔 괜히 공부를 한답시고 학교엘 가서 먼 발치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만 할 뿐이었다.(친구들이 항상 같이 있었으므로) 덕택에 공부에 별 취미가 없던 내가 성적이 향상되어 반에서 10등 안에 들었다.
고교 진학을 그애가 서울의 K고로 하는 바람에 우리의 인연은 서서히 끝나게 되었다. 처음 몇 번은 편지가 오고 갔는데 차츰차츰 그애에게서 편지가 안 오는 거였다. 어린 내가 받았던 마음의 상처가 무척 컸었나 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고 꿈 많던 시절인 고등학교 1,2년을 거의 삭막하게 보내었던것 같으니.
대학 2학년때 J가 한번 대구로 나를 찾아 왔었다. 우리의 우정(?)을 이어가지 못했던 사정과 미안하다는 사과와 지금부터 다시 아름다운 관계를 지속하면 어떻겠느냐고 나의 마음을 타진해 왔다.
나는 "이미 늦었다."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중학 졸업 30주년 모임에서 우리는 해후를 했다.
중후한 중년의 모습을 한 그가 내 옆자리에 앉더니, 품 속에서 사진 한장을 꺼내어 테이블에 놓는다. 빛바랜 흑백 사진엔 까까중 소년과 단발머리의 소녀가 파란 우산 속에 있다.
"이걸 여태 갖고 있었어?" 나의 놀란 물음에 "그럼 어떻게 첫사랑을 잊을 수 있나?" 그가 돼 묻는다.
같은 테이블의 우리 동창 친구들의 감탄과 야유로 그날 밤의 모임은 무척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간혹 동창회 모임에서 만난다거나 친구들 자녀 혼사에서 마주치면 우린 참 반가와 한다.편하고 담담한 좋은 친구 사이로.
반환점을 돌아 되돌아 오는 사이, 나의 느낌이려나? 어느새 뱅긋이 입술을 벌인 꽃송이가 몇 있다.
지금은 우리나라 어디를 가나 벚나무 가로수 길이 많다. 도시의 넓은 길이나 시골의 좁은 길에도 봄이면 벚꽃 천지다. 조그많고 앙징스러운 모습의 꽃은 예쁘기 그지없고 밝은 햇살아래서나, 밤 가로등 조명 아래서는 가히 환상적인 모습이다.
허지만 50여년전 봄비 내리는 청와대 뜰에서 보았던 벚꽃만큼 아름다운 꽃은 어디에도 없는것 같다.
2010,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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